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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화강고래 Nov 16. 2024

반품을 시작했다.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246

반품과 환불이 거의 없이 산다. 그냥 사보고 안되면 반품하지 뭐. 이런 식의 마인드가 없다. 쿠팡, 오아시스, 이마트, 홈플러스를 주로 이용한다. 소량의 식재료는 집 앞 슈퍼마켓이나 근처 롯데마트에 가서 사 오는 게 쉽고 빠르다. 온라인 주문 후 주문서 끝자락에 붙은 고객센터에 대한 안내는 대충 보고 지나쳤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활용하기 시작했다.


쿠팡에서 바나나를 주문한 적이 있다. 꼭 필요한 게 아니라 로켓 프레시의 무료배송기준인 15,000원을 채워야 해서 만만한 바나나를 시켰더니 샛초록이가 배달됐다. 덜 숙성된 바나나가 몸에 좋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한번 베어 물었다가 퉤퉤. 이건 그냥 풋내 나는 돌자체였다. 그래도 혹시 며칠 두면 노랗게 변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에 두었지만 놀라웠다! 변함없는 초록에, 돌덩이로 순간 굳어버린 듯 바나나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그냥 버릴까 하다 처음으로 쿠팡에 반품신청을 했다. 4,000원인가 했는데, 회수 없이 바로 결제 카드로 입금시켜 줬다. 그때 알았다. 사진 찍어 반품 신청하고 알아서 폐기하면 된다는 것을. 지시대로 잘 싸서 버리면 되었다. 처리비용이라고 생각하고 환불받았다.


얼마 후 오아시스에서 케일을 샀다. 이번에는 초록이어야 할 잎이 절반 넘게 가을도 오기 전에 은행잎으로 변신해 왔다. 짙은 녹색채소로 황산화에 좋아 슈퍼푸드로 각광받고 있는 케일인데. 오래간만에 케일주스를 마셔보겠다고 샀는데 황달 맞은 얼굴처럼 누렇게 뜬 잎이 무척 실망스러웠다. 쿠팡환불 이후 약간 자신감이 생겨 자연스럽게 사진 찍어 고객센터에 올렸다. 이번에도 회수 없이 온라인 포인트로 환불해 줬다. 원하는 케일은 얻지 못했지만 보상이라도 받으니 찜찜했던 마음은 홀가분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노란 잎이 몇 장 교묘하게 섞여있으면 초록잎만 골라 먹곤 했다. 정도에 따라 판단 후 이제는 환불신청을 할 수 있는 용기가 내 안에 자리 잡았다.


홈플러스에서 밤을 사서 삶았다. 고구마만큼이나 밤을 좋아해서 까먹기 귀찮아도 가을이면 잊지 않고 산다. 가족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각자 숟가락 들고 파서 먹는 재미가 있다. 처음에 남편은 말했다.

"엄마는 까서 줬는데..."

"우리 엄마도 먹기 편하게 다 까서 줬어. 근데, 지금은 각자 원하는 만큼 알아서 먹자. 난 다 까줄 수 없어. "

그렇게 말한 뒤로는 알아서들 먹는다. 평상시대로 밤을 삶았다.

"앗. 이것 봐."

"여기도. 썩었어. 이것도, 와..."

한 봉지를 삶았는데, 반이 넘게 썩었다.

우리보다 빨리 먹는 남편은 이빨로 반을 쪼갤 때마다 더 많이 썩은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남긴 말은,

"내 이빨이 아깝다."

썩은 밤을 수북이 앞에 둔 상황은 화가 났지만, 그날 들은 말 중 가장 웃겼다. 올해 들어 여러 번 샀지만 유독 이번 밤은 최악으로 썩은 게  많았다. 계속 튼실하고 속이 꽉 찬 달콤한 밤을 먹다가 이런 게 처음이라 놀랐다. 겉은 멀쩡한데 속은 썩어있다니.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알다가도 모를 사람처럼 보였다. 마트도 겉만 보고 속을 모르니 불만을 제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진상소비자 아니야? 그냥 버릴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썩은 밤을 모아 사진을 찍고 고객센터에 올렸다. 올리면서도 내가 뭐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여전히 있었다. 그래도 이런 게 있었다는 식으로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다음날, 고객센터에서 친절한 목소리로 전화를 주셨다. 죄송하다고 하면서 썩은 밤을 회수할 테니 문 앞에 두면 반품신청을 하겠다고. 나는 부드럽게 상황을 설명하며 반품신청이 어쩐지 어색하고 불편하다는 사족을 붙였다. 앞서 다른 쇼핑몰과 달리 회수를 하겠다니 꼼꼼하네, 확인하고 환불하나 싶었다. 거짓말이 아니고 나쁜 소비자도 아니었기에 혹시나 하고 봉지에 따로 모아둔 밤을, 썩은 밤을 정성스레 깨끗한 비닐에 싸서 내놨다. 그리고 배송 오는 편에 회수해 가더니 몇 시간 뒤 환불 메시지를 보냈다.  



나의 씁쓸하면서도 기특한 변화를 정리해 써봤다. 작은 것을 아끼는 것보다 큰 것을 보고 그 시간에 노력하는 게 낫다는 말이 귓가에 맴돌기도 했다. 몇 천 원 아껴보겠다고 이런 수고를 하고 있나라는 생각. 30분 이내의 자투리 시간도 아껴 독서를 하고 글을 쓰는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게 미래를 위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 그런데, 주부로 살면서 이왕이면 먹거리와 돈관리에 미약한 노력이라도 해 보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깐깐하고 아끼는 주부 모드로 진입한 건 확실했다. 만 원 이하의 적다면 적은 돈도 다시 보고 있었다. 더구나 고객만족을 중시하는 소비시대인 만큼 여기저기서 즉시 반품과 환불이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별거 아닌데, 사진 찍어 올려 몇 줄 쓰고 반품하는 행위 집안 살림을 꼼꼼하게 챙긴다는 자기만족을 살짝 얹어줬다. 진상 소비자는 아니지만 불만족을 표현하면서 가정살림에 기여하고 있구나 싶었다. 허투루 돈을 쓰지 않는구나라는 그런 느낌. 특히, 엥겔지수가 상당히 높은 우리 집 특성상 눈에 차지 않는 식재료를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 

다른 소비는 줄여도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하다. 먹는 대로 산다. 주부역할로 자주 지치는 내가, 소소한 반품 활동을 통해 희미하게라도 가끔 빛나는 것 같은 효용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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