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까지 흐리고 쌀쌀맞던 기운이 사라져 포근했다. 다음 주는 눈비소식도 있으니 최적의 날씨가 아닐 수 없었다. 이번 주말이 김장하기에 적기라는 인터넷 기사도, 22일이 "김치의 날"이라는 의미부여도 덩달아 우리의 김장을 응원해 주는 듯했다. 주부들 사이에서 이맘때쯤이면 "김장하셨냐?"가 인사말일 정도로 김장은 한 해의 끝자락을 향해갈 때 주부가 꼭 해야 하는 일로 여겨졌고 여전히 그런 듯하다. 엄마세대와는 달리 친정이나 시댁에서 보통은 받아먹고 있는 우리 세대 주부도 언제 김장을 하는지 정도는 서로 안부 묻듯 건네는 것을 봐도 그렇다.
작년보다 한층 더 몸이 쇠약해진 시어머니의 건강을 고려해 시누가 전날 먼저 가서 김장준비를 하고 난 당일 아침에 갔다. 안 와도 되니 내 몸 건사하라는 배려는 마음으로만 받고, 김치통을 챙겨 일찍 집을 나섰다.배, 사과, 양파를 믹서기에 가는 시어머니에게 먼저 도착인사를 드렸다. 시누가 앉아있는 거실로 가서 파, 쪽파, 미나리, 갓을 칼로 써는 일부터 합류했다. 절인 배추들이 이미 베란다 소쿠리에 널려있었다. 밭에서 배추를 뽑고 직접 절여서 김장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년 김장은 큰 행사임에는 틀림없다. 시어머니와 시누가 주연배우, 난 비중 있는 조연, 남편은 엑스트라 같은 역할을 한다.
거실 한가운데에 김장매트를 깔고 마늘, 생강, 고춧가루, 새우젓, 액젓, 찹쌀풀 같은 갖은 양념을 아낌없이 투척해서 속을 만들었다. 배추 60 포기에 맞는 양념을 어떻게 계량하시는지 매번 대충 하는 것처럼 보이나 엄마들이 그렇듯 거의 정확한 계량에 오랜 세월 쌓여온 넘사벽 감에 감탄했다. 작년인가부터는 총사령관처럼 위엄 있게 지시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어느덧 스멀스멀 힘이 빠진 공처럼 약해진 모습으로 김장에 참여하셨다. 대신 자연스럽게 시누의 힘이 세지면서 어머니의 빈자리를 보강했다. 남편과 나는 장갑을 끼고 다듬은 채소와 양념을 쓱쓱 섞어 속을 완성했다. 그 많던 갖가지 재료가 한데 어우러진 양념 속을 배추양에 맞게 소분했다. 속 넣기는 전부 나와 시누의 일이었다. 배추 한 잎, 한 잎 들춰 속을 넣을 때마다 역시나 병원에 있는 엄마생각을 했다. 지난날 철없이 김장날에도 바쁘다며 나갔던 내 무심함을 속죄하듯, 시댁김장에서라도 잘하려고 매년 애쓰는 중이다. 난 이기적인 딸이었다. 더없이 효녀인 시누는 나의 과거와 현재를 반성하고 노력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언니, 울 엄마는 아팠으니까요. 날 의지하니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김장을 했죠. 엄마가 건강하면 안 했죠."
1시간가량 이런 저련 이야기를 하면서 배추를 차곡차곡 김치통에 담았다. 내 김치통에, 시누 김치통에, 그리고 어머니 김치통에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김치를 쌓았다.
속을 넣는 사이, 어머니는 김장에 빼놓을 수 없는 수육과 겉절이로 점심을 차리셨다.
"엄마 수육 맛없는데, 그냥 시켜 먹지."
그렇게 말하는 시누가 참 부럽다. 수고스러운데 왜 수육을 했냐고 돌려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살코기만 삶았으니 시중에 파는 수육보다 심심하고 퍽퍽하니 맛이 없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러니 저러니 난 그저 엄마가 해 준 것이면 다 좋아 수고스러워도 만족했다. 맛있게 먹고 나머지 김치 속을 채워 마무리했다.
시작 직후부터 옆구리는 계속 뻐근하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자세가 불편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우두둑 소리를 내며 다리를 세우고, 구부정한 허리를 서서히 폈다. 눈은 완성된 김치를 가득 품은 김치통을 향했다. 100만 원이 훌쩍 넘는 김장 재료 하나하나가 어우러져 김치통에 담겨있었다. 예전, 엄마가 김장을 앞두고 며칠 동안 재료를 사 오고 씻고 다듬고 했던 것처럼, 김장이 완성되기까지 눈에 보이지 않게 스며든 모든 노고도 아우라처럼 김치통 주변을 둘러쌓다. 난 그저 속만 버무리고 넣었는데도 힘들다고 느꼈다. 돈과 노동이 엄청나게 투입되니 점차 김장을 안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 같다. 배추와 재료값 부담이 커지는 탓도 있지만 김장은 고된 노동이기 때문이다. 명절의 의미가 퇴색하고 각자 쉬거나 간소하게 보내듯이 김장도 차츰 그 길을 따라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언젠가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될지 모른다. 부끄럽지만 혼자 나서서 김장할 엄두가 안 난다. 처음이 어렵지 하다 보면 늘긴 하겠지만 계속 어머니 김치를 함께 모여 만들면서 오래도록 먹고 싶다. 참, 이기적이다. 시누에게 슬쩍 우리 집에서 해보자고 이야기했지만 아직은 그럴 수 없다고. 어머니가 필요하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김장에 참여하는 겨울맞이 행복을 계속 누리고 싶다. 우리가 재료 손질에, 버무리고, 속을 넣더라도 어머니가 곁에 건강하게 계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