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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식엔 짜장면이지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272

by 태화강고래

"방학했으니 OO 맛있는 거 사줘. 너희 클 땐 짜장면이 최고였는데."

"안 그래도, 우리 짜장면 먹으러 갈 거야."


그랬다. 80-90년대 국민학교 시절, 엄마는 빠듯한 살림에도 잊지 않고 짜장면을 시켜주셨다. 학교 다니느라 애썼다고 그날의 특식으로 짜장면을 먹었다. 우리 삼 남매는 입 주변을 검게 칠하며 참 맛있게 먹었다. 노래가사처럼 엄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시며 지켜보기만 하셨다. 한 그릇에 천 원 정도였다고 들었고, 90년대가 돼서 2-3천 원 했던 것 같다. 단골 중국집 서향원의 배달통은 잊을 수 없는 추억 속 물건이 되었다.


5학년 방학식을 앞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딸아이와의 점심을 계획했다. 안 가본 학교 근처 중국집에 가보고 싶다며 그곳에서 둘만의 오붓한 식사를 며칠 전부터 기대했다. 3교시 후 딸아이를 만나러 가는 길에 손에 꽃다발을 든 사람들을 마주쳤다.


'아, 오늘 졸업도 하는 날이구나!'


그게 시작이었다.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딸아이와 함께 중국집에 들어선 순간, 이미 식당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넓은 홀은 음식을 먹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대기명단을 보니 이미 우리 앞에 20여 명 가까운 이름들이 쓰여 있었다. 주방장 두 명이서 웍을 들고 볶느라 정신이 없고, 서빙하는 직원 세명도 넋이 나간듯했다.


"방학식 생각만 했어. 미안해. 졸업식도 있다는 생각을 했으면 예약을 했을 텐데."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는 딸아이를 보니 미쳐 준비를 못한 엄마는 죄인이 되었다. 그럴 수도 있지라고 웃으며 슬쩍 넘어가려고 했지만 안 통하는 눈치였다. 둘이서 짜장면을 먹을 생각으로 부푼 가슴이 눈물로 떠져버렸다. 별것도 아닌데 이 아이에겐 대형사고를 친 싸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 회사에서 예약을 하지 못해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더욱 난리가 났겠지만 VIP를 모신 것처럼 순간 빨리 해결해야 했다.


식당을 나와 자주 가는 중식당에 전화를 걸었다. 테이블 두 개가 남아 있어 식사를 할 수 있지만 예약은 안된다고. 시트콤의 한 장면처럼 우리는 뛰었다. 영하의 날씨에 뺨을 스치는 찬 바람과 싸우며 온 힘을 다해 짜장면을 향해 달렸다. 익숙한 중식당. 숨을 헐떡이는 우리와 달리 어르신들이 평온하게 식사 중이셨다. 4인석에 앉았다. 마스크를 벗고 마주 앉아 바로 주문했다. 곧이어 7명이 식당으로 들어와 머뭇거리자 직원이 우리 테이블 하나를 가져가 붙였다. 1분이라도 늦었으면 여기서도 대기를 했구나 싶어 아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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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분 전의 상황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맛있는 음식 덕분에 자취를 감추었다. 기분 좋게, 행복하게, 먹기만 했다. 잔칫날에 잔치음식이 빠질 수 없듯 특별한 날에 음식으로 흥을 돋았다. 미니 탕수육이 먼저 나왔다. 딸은 웃으며 서로 하나씩 먹여주자고 했다. 평소 찍먹 부먹을 외치던 딸도 부먹으로 나온 귀여운 탕수육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부드럽고 달달한 탕수육이 허한 우리 속을 따뜻하고 든든하게 데우기 시작했다. 평소 가족모두 올 때보다 탕수육을 배불리 먹었다. 반쯤 배가 차오르자 대망의 짜장면이 등장했다. 슥슥 비벼 아이에게 먼저 덜어주고 나도 먹었다. 부드럽게, 느끼하게, 달게 목 넘김이 좋았다. 오늘따라 짜장면이 더 맛있었다면 거짓말일까. 배부른 자의 여유를 느끼면서 방학 짜장면 먹기 행사는 무사히 끝났다. 회사에서든, 집에서든 예약과 준비는 필수라는 걸 다시 느꼈다. 가족이야말로 VIP중의 VIP라, 어설픈 엄마는 오늘도 애썼다. 그래도 함께해서 행복했다. 귀여운 짜장면 소동쯤으로 기억할 추억하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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