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긴 춥다. 최저기온 영하 15도 최강 한파라고 며칠 동안 안내문자가 날아오고 거리는 황량했다. 버려진 도시, 영화 세트장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외출을 꺼리고 집안에 머무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듯 세상이 조용했다. 몸이 근질근질하다는 말이 어찌나 딱 들어맞던지 답답함이 추위를 매번 이겼고 아무리 춥다 해도 낮에는 그나마 따스한 햇살덕에 산책을 다녔다. 잠깐이라도 매일 걷기를 꼭 하고야 말겠다는 나 같은 사람들이 꽤나 지나다녔다. 대부분 어르신들이었고, 가끔 러닝 하는 젊은이들이 앞질러서 숨을 헐떡이며 지나쳤다.
햇살의 손길이 닿지 않은 구역은 제대로 겨울 풍경을 만들었고 지나가던 나를 멈춰 세웠다. 깊은 산골짜기에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언 것도 아니고, 넓디넓은 한강 물이 살짝 얼어붙으면서 신비로운 풍경을 연출한 것도 아니었다. 하얗게 꽁꽁 얼어붙은 동네 탄천일 뿐인데, 유독 다정하게 나를 붙잡길래 사진을 찍으며 자연스럽게 추억여행을 떠났다.
탄천
겨울이면 우리는 서오릉 근처 논 스케이트장에 갔다. 논에 물을 가득 채워 겨울만 되면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하는 그곳에서 추위를 이기며 신나게 놀았다. 맘카페도 없던 시절, 엄마는 어디서 들었는지 그곳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국민학교 겨울방학이면 자주 그곳에 갔다. 난생처음 무겁고 발목을 조이는 스케이트 신발을 신고 엉거주춤 한 발짝씩 뗄 때마다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강습도 없이 맨 몸으로 용감하게 얼음판에 들어갔다. 그 시절, 각자 몸으로 타는 법을 익히는 수밖에 없었다. 초보, 중수, 고수가 뒤섞였다. 쌩하고 옆을 지나치는 사람을 감탄하며 쳐다보다가 뒤로 넘어졌고, 여기저기서 엉덩방아를 찧는 아이들과 엉켜 같이 넘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코끝은 시렸고 손도 발도 시렸지만 옷 속에서는 어느새 땀이 삐질삐질 났고, 비닐하우스에서 파는 떡볶이와 라면을 먹으며 체력을 보충했다. 콧물이 흘러도 땀이 흘러도 셋은 그저 좋다고 집에 안 가겠다고 엄마를 졸랐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몸을 움직이는 우리와 달리 지켜보는 엄마는 추웠을 텐데도 내색 없이 지켜보셨다. 그렇게 한나절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엉덩이와 다리를 중심으로 온몸이 쑤셨지만 다음날이면 거뜬했다. 스케이트장에 가는 날을 기다렸고 또 기다렸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반복된 연습 덕분에 어느 순간부터 우리들은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밀며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선수같이 날렵하지는 않아도 더 이상 넘어지지 않고 스스로 타는 기쁨을 누렸다.
논 스케이트장의 추억을 만들어준 엄마가 떠올라, 나도 엄마처럼 해주고 싶었다. 스키보다 접근성이 좋은 스케이트는 태워줄 수 있겠다 싶어 나섰다. 차로 30-40분 걸리는 울산 아산체육관 아이스링크장에 가서 강습을 받으며 겨울 추억거리를 더했다. 모든 일에 정해진 시기가 없다 해도 그 나이 그 때여서 가능했다. 추운 아이스링크장에서 아이들을 지켜봤다. 예전 엄마처럼 아이들의 몸짓 하나하나에 시선을 따라가느라 처음에는 내가 더 긴장했다. 얼음판에서 뿌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볼 때면 괜스레 덩달아 벅차올랐다. 사진으로 순간을 남기느라 바빴다. 차근차근 강사의 지도를 받은 덕분에 아이들은 생각보다 빨리 배웠고 어설프게나마 넓은 링크장을 누빌 수 있었다. 발이 아프다며 힘들다는 투정 섞인 말을 했어도 스케이트 타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강습 마지막 날을 기념하기라도 하듯, 지역 방송국에서 겨울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을 영상에 담아 준 덕분에 뉴스에도 살짝 등장하는 행운을 얻었다. 자신들의 엉덩이가 나왔으니 출연한 것이라고 까불까불 자랑하던 아이들 모습이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코로나 19가 심각해지면서 아쉽게도 강습을 끝냈고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아산체육관에서 강습 중인 아이들
겨울 스포츠를 즐길 만큼 운동에 진심인 적은 없지만 엄마 덕분에 스케이트를 탈 수 있었다. 철없던 시절, 지나고 보니 참 소중한 겨울 추억을 만들었다. 지금은 실내 아이스링크장에서 언제든 스케이트를 탈 수 있지만 스케이트는 겨울에 타야 제 맛인 것 같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빙판길부터 걱정하는 나이가 되어 선뜻 스케이트를 타겠다고 나서지는 못하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빙판 위를 씽씽 달린다. 엉덩방아를 두려워하지 않고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시절이 꿈처럼 아련하게 내 발길을 따라 잠시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