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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 대로 눈에 보이나 봐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275

by 태화강고래

아들의 병원 진료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한 남성이 같이 탔다. 갑자기 나를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같은 아파트 라인에 사시는 것 같아 인사드려요."

"아. 네. 안녕하세요. 저도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못 했네요. "


같은 라인에 살면서 챙겨서 인사를 주고받는 몇 명을 제외하면 보통은 엘리베이터에서 스쳐 지나치는 사람에 불과하다. 아무리 자주 마주쳐도 누구도 먼저 인사를 하지 않는다. 때론 먼저 인사를 해 볼까 머뭇거렸지만 그저 조용히 있었다. 가끔은 울산 아파트에서처럼 기계적으로라도 인사를 주고받는 게 마음은 편할 듯 싶었다. 자주 지나쳤지만 먼저 인사를 안 해 민망하게 느껴지고 있던 찰나에도 아파트에서도 아니고 제3의 공간에서 갑자기 내게 말을 건 이유가 분명 있을 텐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렇게 갑자기 대화가 시작되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큰 아이 1학년때 놀이터에서 아이를 기다리며 엄마들과 시간을 보내야 했을 때 가끔 엄마아빠들과 수다를 떨던 분이었다. 학교 선생님이고 가정적이라는 말을 주변 엄마들을 통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따로 인사를 해 본 적은 없었다.


"혹시 환우 아니세요?"

"네? 네. 어떻게 아셨죠?"

"제 눈에는 보이더라고요. 저희 아내도 아프거든요."


그렇게 남자는 아내의 유방암 투병이야기를 담담히 꺼냈다. 친한 사이도 아니고, 처음 인사를 나눈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도 나도 갑자기 이야기를 나눴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시작한 아내 이야기. 작년 여름부터 삼중 음성 유방암으로 항암을 끝내고 머리카락이 전부 빠지고 없어 가발도 있지만 모자만 쓰고 다닌다고 했다.


"저희 집에 환자가 생기니 그제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보이더라고요. 계속 모자를 쓰고 다니시니 아무래도 환우가 아닌가 싶어서 한 번쯤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네. 머리가 잘 자라지 않아서 1년 내낸 모자를 쓰고 다녀요. 그게 편하기도 하고요."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아내에게 힘이 될까 싶어 말씀드렸습니다. 암카페에서 위로를 많이 받는 거 같던데, 가능하실 때 아내랑 자리를 마련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요."

"네. 그러세요. 원하실 때 연락 주세요."


같은 아파트에서 늘 모자 쓰고 다니는 나를 본 게 전부였을텐데 작년부터 색다르게 비췄을 내 모습을 되돌아봤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편한 대로 사시사철 모자를 쓰고 다니는 나를 인지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텐데 그는 알아봤던 것이다. 당황스럽고 애처로웠다. 누군가에게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보이는 사람으로, 그것도 누구나 부러워하는 꽤 괜찮은 경험으로서 보이게 된 게 아니라 처음에는 살짝 슬펐다. 내가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신기한 눈을 가지게 된 것처럼 그도 그런 경험을 했던 것이다. 관심의 눈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보는 세 번째 눈이 생긴 셈이다. 아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 낯선 나에게 말을 건 그의 진한 마음이 느껴지면서 이것저것 말을 늘어놨다. 내가 도움이 된다면,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해 주고 싶었다. 암경험도 경험이라, 터널을 통과해 본 선배로서 누군가 내 이야기를 통해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언제든지 마주 보고 만날 것이다. 이제는 엘리베이터에서 그 부부를 만나면 인사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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