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326
"인생은 어쩌다 결정되고 어쩌다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라는 유퀴즈에 출연한 정신과 의사의 말이 그날따라 유독 나를 붙잡았다. 처음 듣는 말도 아닌데, 새삼스레 수수께끼 같은 인생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쩌다"가 없는 인생이 있을까? 어떻게 하다가, 의지와 상관없이, 우연히. 주로 부정적이며 안타까운 결말을 연상시킨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말에 긍정보다 부정적인 의미가 먼저 떠오른다. 상황 속에 갇혀 내 의지나 계획과 상관없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마주하게 되는 그런 순간은 행불행 가릴 것 없이 인생에 자주 찾아온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살고 있을까?를 되짚어보기 전에 역시나 엄마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어쩌다 엄마는 지금처럼 살게 되었을까? 쓰러지기 전에 건강관리에 신경을 썼더라면, 아니 여동생 산후조리를 위해 텍사스행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면, 같이 살던 아빠나 결혼해 살던 내가 조금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엄마의 현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인과 관계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그저 어쩌다 닥친 일일까? 한두 번도 아닌 그 질문에 나는 아파하고, 앞으로도 살아가는 동안 아파할 것 같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장기요양 인정조사를 나왔다. 2년에 한 번씩 갱신신청을 하는 터라 특별한 준비 없이 병원에 가서 보호자로 참석했다. 엄마는 차분히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조사에 참여하셨다. 본인의 이름과 현재 거주하는 곳에 대해서는 가볍게 넘어갔다. 숫자와 관련된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답을 하지 못하셨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은, 크게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사는 엄마에게 시간의 흐름은 숫자가 아닌 재활운동을 하는 날과 안 하는 날로 구분되어 있었다. 하긴, 나조차도 핸드폰 시계를 보지 않고 며칠인지 질문을 받으면 즉각 대답을 못하는 판에 엄마가 그걸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비정상적으로 느껴졌다. 공단 직원분 또한 자신도 날짜 확인을 위해 시계를 봐야 한다며 엄마의 반응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나무, 모자, 자동차
글자와 그림으로 표현된 세 단어가 적힌 종이를 보여주며 엄마에게 읽어보라고, 조금 있다가 물어볼 테니 기억하고 있으라 했다. 긴장한 학생처럼 엄마는 더듬더듬 단어를 읽으셨다. 그리고 10여 분 뒤에 직원분이 엄마에게 물었다.
어머니, 아까 제가 보여드렸던 종이에 적힌 글자 기억나세요?
엄마는 천천히 또박또박 창고 속에서 조심스레 물건을 꺼내듯이 단어를 나열하셨다.
나무, 자동차, 모자
대단하세요! 직원의 칭찬에 엄마는 기분이 살짝 좋으신 듯했다. 몸은 불편해도 정신만큼은 아직 쓸 만하다고 생각하셨을 것 같다. 나 아직 정신은 괜찮아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조사가 끝나고 잠시 직원분과 이야기를 나눴다.
저희 엄마도 밭에서 일하시다 뇌출혈로 2011년 2월에 쓰러지셨어요. 그런데 재활치료를 거부하시며 상태가 악화되기만 했고 지금은 그냥 누워만 계세요. 그런 저희 엄머와 너무 비교가 되시네요. 보호자분의 어머니는 의지가 대단하세요.
서로의 아픔을 알아서일까. 갑자기 그분의 개인 이야기에 마음이 활짝 열렸다. 본인의 어머니와 비슷한 환자들을 마주할 때마다 어떤 마음이 들까, 얼마나 괴로울까, 동병상련이란 게 이런 심정이었다.
저희 엄마는 의지가 강한 편이세요. 운동이라도 열심히 해야 하루 밥값을 했다고 생각하시고 그 덕분에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급격히 나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어요. 지금도 운동 없이는 답답해서 못 견디세요.
온실 같은 집에서만 살던 엄마는 60이 넘어 병원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환자, 간병인, 보호자, 간호사, 조무사, 물리치료사, 의사, 행정실장 등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뒤섞여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뒤늦게 인정사정없는 냉혹한 사회에서 오늘도 살아가신다.
갑자기 바뀐 환경에서 꿋꿋하게 살아온 엄마는 몸은 불편해도 정신은 멀쩡하시다. 주위 지인 부모님들과 달리 아직 치매걱정은 안 한다. 이렇게 씩씩하게 잘 버티는 엄마에게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속상하다. 견디는 그 속은 어떨지 가히 짐작할 수 조차 없다. 엄마의 꺾이지 않는 의지도 바람 앞의 촛불 같을 때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무심한 세월 따라 안 그래도 불편한 몸이 쑤시고, 마음마저 아플 때면 모아둔 수면제를 털어놓고 싶은 유혹을 받으신다는 말씀을 고개를 숙인 채 자주 하신다. 본인이 세상을 등지면 남은 자식들에게 상처를 주는 게 두려워 힘들어도 버티고 있으시다고. 튼튼해 보이지만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그릇이 떠오를 때면 그래서 더욱 무섭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