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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니까, 그런 거겠지만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354

by 태화강고래

폭삭 늙은 거 아는데 왜 자꾸 말하는 걸까?


딸의 긴 머리를 말리느라 함께 거울 앞에 섰다. 매일 아침 우리 집 풍경이다.

그날은 늦잠꾸러기가 학교에 일찍 가야 한다고 7시 전부터 일어나 바삐 움직였다.

핸드폰을 보다가 갑자기 툭 말을 꺼냈다.


엄마 진짜 많이 늙었어요.

아빠는 옛날하고 큰 차이가 없는데 엄마는 너무 달라졌어요.


그러면서 자꾸만 날 곁눈질로 쳐다본다.

거울 속에 비치는 나를, 둘은 불편하게 속하게 흘끗흘끗 본다.


알아.

지난번에 외할머니도 엄마보고 뭐라 하셨는지 알아?

너네 아빠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인데...


추석 때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제부가 사 온 싱싱한 대하를 까먹느라 손과 입이 바삐 움직였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서로를 챙기며 한입씩 맛보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안 드시겠다며 멀찍이 앉아 계시던 엄마, 우리들을 관찰하고 계셨다. 더 먹어라, 더 까줘라 등등 한 마디씩 보태시며 관심 있게 지켜보셨다. 식탁을 치우고 나와 단둘이 있을 때 엄마는 슬쩍 말씀하셨다. 나란히 앉은 우리 부부를 지켜보고 너무 속상하셨다고, 너만 늙었다고, 사위는 그대로데, 내 딸만 늙어 속상하다는 말씀을 유독 길게 하셨다. 그게 엄마의 눈이었다. 10명 가운데 나 혼자 세월을 삼킨 것도 아닌데 맏딸이 늙어가는 게 안타깝기 그지없었나 보다. 그 말을 듣고 암 탓을 했지만 슬픈 속마음을 숨기기는 어려웠다.


억울하다. 5살 연하인 내가 연상 같다니. 그나마 5살 연하여서 망정이지 아니었음 어쩔뻔했을까.

아들도 엄마가 아빠처럼 50대로 보인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남이 아닌 가족이니까 가감 없이 말한다지만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서 그런지 현실을 되돌리고 싶을 정도로 서글프다.


억울하다. 난소 제거와 항암치료로 내 외모 시곗바늘은 전력 질주를 한 듯하다. 정상적으로 호르몬이 작용했다면 10년 후에 이런 모습이었을까. 그래도 가족이니 이렇게라도 현실을 알려주나 싶어 고맙다고 해야 할까.


피할 수 없어 과감히 인정하기로 했다. 타인 앞에서도 나 스스로에게도.

그래 나 늙었어!

그래도 죽지 않고 같이 숨 쉬고 있으니 다행이지!

듣기 좋은 말로 나를 위로하고 나아가 가족에게도 능청스럽게 이야기한다.

난 외면보다 내면에 신경 쓰는 사람이라고!


누구나 늙는다. 그런데 늙는다는 게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어떻게 늙어갈지가 중요하다는 화두를 던진 저속노화 마인드셋을 주장하는 교수의 말에 희망을 걸고 산다. 도파민 폭죽을 터트리는 일상이 아니라 노잼 같은 일상을 살면서 천천히 늙어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겉은 늙었어도 속은 아직 안 늙었기를 희망하며, 그리고 아직 나에게는 노화의 시간이 충분히 남았다고 믿으면서, 거북하고 서글픈 그 말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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