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28
주말저녁 9시 20분.
우리 가족은 각자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거실 TV 앞으로 모여든다. 딸이 가장 먼저 소파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 식구들을 불러 모은다.
곧 시작합니다. 어서들 오세요!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보는 동안 비로소 우리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 이 시간이 유일하게 각자의 시간에서 나와, 한자리에 모여 같은 주제로 동등한 입장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아이들과 대하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건 작년 5월까지 총 32부작을 방영한 '태종 이방원' 때였다.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아이들이 역사에 흥미를 보였다. WHY 역사책을 보기 시작한 아들과 함께 오빠가 하는 것을 따라 하기 좋아하는 딸이 한국사, 세계사에 눈을 뜨고, 삼국지를 읽었다. 서로 인물 이름 맞추기 놀이를 하고 삼국지 레고를 사서 놀 정도로 한동안 삼국지에 푹 빠져 지냈다. 울산에 사는 4년 동안 울산과 경주의 유적지를 다니는 것은 물론 서울에 갈 기회만 생기면, 서울 5대 궁 투어와 박물관 투어를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이들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작년에 절정에 달했던 거 같다. '태종 이방원' 시청 내내 몰입한 나머지 끝나고 잘 때까지 이방원과 등장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책을 다시 뒤적이며 궁금증을 해소했다. 문경 세트장까지 찾아가서 "여기가 이성계의 집이었다, 이방원이 여기서 걸어 다녔다" 등 기억을 더듬으며 텅 빈 세트장을 우리끼리 채워나갔다. 역사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였지만, 실제라고 믿을 만큼 아이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컸다. 결혼 전 엄마가 즐겨 시청하시던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을 슬쩍 본 이후로 몇십 년 만에 열심히 챙겨보게 되었다. 이제는 자식들과 함께.
그렇게 푹 빠졌던 '태종 이방원'이 끝나자 다 같이 즐길 드라마를 다시 기다렸다. 마침내 이방원을 잇는 KBS의 34번째 대하드라마인 '고려거란전쟁'을 11월 11일부터 만났다. 고려시대, 그것도 거란과의 길고 길었던 3차에 걸친 26년간의 전쟁을 주제로 270억 제작비를 들인 작품이라 방영 전부터 기대를 품게 했다. 우리가 다녀왔던 문경세트장의 풍경도 드라마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 등장하는 고려 왕과 주요 인물의 업적에 대해서 암기하기에 바빴던 내가 본 드라마 첫회 남색에 빠진 목종에 대한 묘사는 충격적이었다. 15세 이상 관람가인데 초등학생인 아이들이 봐도 괜찮은지 잠시 우리 부부는 어색한 침묵을 했다. 목종과 천추태후에 대해서도 아이들은 이미 책에서 봤다고 아는 척을 했다. 엄마는 잘 모르니 너희들이 잘 가르쳐주면 되겠네라고 웃으며 넘기기도 했다. 앞으로 현종과 강감찬의 활약이 기대된다.
주말 저녁이 한동안 기다려질 것 같다. 우리 역사를 주제로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게 참 좋다. 예전 친정식구들이 모여 드라마를 보던 시절도 생각난다. 서로 원하는 채널을 돌리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각자 취향에 맞는 유튜브를 시청하기에 우리 집 TV는 항상 꺼져 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기에 우리 아이들도 지금의 드라마와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되겠지.
모든 걸 뒤로하고, 같이 드라마를 보는 행복한 시간이다. 이 순간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