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374
여느 때처럼, 햇살 좋은 탄전길을 걸으며 살아있음을 느꼈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잔잔하면서도 부산스럽게 귀가에 들려왔다.
2026년 봄이 오는 중이다. 빨리 오라고 재촉한 봄이다.
매년 3월이 되면 어김없이 그 해 봄이 생각난다. 살랑거리는 따스한 바람에 노란 산수유꽃과 하얀 목련이 기분 좋게 세상을 환하게 비출 때, 나란 생명은 몸을 잔뜩 움츠리며 추위를 견뎌야 했다. 봄기운마저 슬픔을 부채질하는 그런 시기였다. 재수할 때 실패자로 한없이 작아졌던 봄 이후, 내 인생 두 번째 서글픈 봄, 암 환자로 정식 입문한 봄이 찾아왔다.
울산으로 이사 간 직후, 주말을 맞아 꿈꾸던 부산 해운대 바다와 경주 첨성대를 찾아갔지만 무슨 정신으로 봤는지 지금 와 생각해 봐도 알 수 없다. 아름다운 풍경을 뒤로한 사진에는 설렘과 기쁨 대신 창백한 얼굴의 내가 있었다. 수술 전 짧은 나들이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한 달에 두 번 수술을 연달아하며 병원에서 봄은 흘러갔다. 그렇게 잔인한 봄은 시작되었지만 점점 나의 봄을 되찾기 시작했다. 적응의 동물인지라 처한 환경에서도 봄은 소소하고 진실하게 나를 잊지 않고 찾아왔다. 그렇게 암이 찾아온 이후 봄은 매년 비슷해 보여도 명도와 채도에서 미묘한 차이를 남기며 두 팔 벌려 반갑게 맞이하게 되었다.
5년이라는 태산처럼 높아 보이던 시간의 산을 엉금엉금 넘고,
6년째는 살짝 가볍게 넘었으며
발병 7년이라는 산에 들어선 지금, 때론 급히 때론 느릿느릿 강약을 조절하며 걷고 있다.
산정특례가 끝났다. 정확히 따지면 작년 초에 끝났지만 의료계 비상사태로 얼떨결에 연장 혜택을 받고 병원검진을 다녔다. 드디어 새해부터 달라졌다. 6개월마다 찍는 가슴과 복부 CT검사를 위해 키오스크에서 수납을 클릭하자,
217,000원 결제하시겠습니까?
1초 망설이다 3개월 할부를 선택하고 영수증을 받았다.
정 상 급 여
선명한 글자를 두 눈으로 읽었다.
하산하라! 는 스승의 말씀처럼 들렸다. 특별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중증 환자에서 졸업시키니 이제 보통 사람으로 잘 살아가라는 명시적 선포 같았다. 다만 누가 들을까 봐 건조하게 문자와 숫자로 알려주었다.
그래, 이제 내 돈 내고 병원 다니는 거다!
돈 내고 안 아픈 게 낫지! 그동안 엄청 고마웠다! 지원이 없었더라면 가정 경제를 흔들었을 텐데!
이 같은 단순한 생각을 하며 세상 속에 홀로 선 순간이었다.
담담하게 지난 시간을 뒤로하고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향해 꼿꼿이 걸어가는 일만 남았구나. 차디찬 봄을 잊을 수는 없겠지만 포근하고 부드럽게 나를 감싸는 봄을 만끽하며 살 수 있는 귀한 시간이 주어졌다.
아파보니 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프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나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타인과의 비교에 공격당하며 나를 갉아먹는 스트레스에 짓눌려 살았을지도 모른다.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는 생존의 조건을 경험했으니 이제 적당히 내려놓을 줄 아는 마음을 장착하게 되었다. 중년의 마음가짐을 자연스레 체득하게 되면서 때로는 슬프기도 하고, 때로는 다행이기도 하다. 암이 통과했다고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으로 짜잔하고 변신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고 지그시 바라보는 눈길만큼은 누구보다 탁월하게 된 것 같다. 추운 겨울을 지나 곳곳에서 만나는 생명들이 한없이 반갑고 고마운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