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47
연말이라 한 해의 마무리 작업이 곳곳에서 한창인듯하다. 직장인의 삶을 잠깐 들여다보니, 지금이 인사발령 시즌이었다. 주부인 나와는 상관없는 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남편의 일이라 내 일인 양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 본사가 울산으로 이전했으니 그곳에서 퇴직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5년을 지냈다. 작년 말 남편 혼자 울산에 남기고 나머지 셋은 경기도로 돌아오며 1년 가까이 주말부부로 살았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주말부부를 할 수 있다"라고 주변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얼마나 좋길래? 부럽다는 말만 했다. 보통은 금요일 저녁 또는 운 좋게 서울 출장이라도 잡히면 목요일에 집에 왔다가 일요일 오후에 내려가는 남편을 볼 때마다 '참, 고생스럽다. 빨리 이런 생활이 정리되면 좋을 텐데. 생활비는 두 집 살림에 이중으로 들고, 고생이다, 고생.' 그랬다. 혼자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여 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시부모님의 끼니 걱정도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니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이 편하다는 것을 스멀스멀 느끼게 되었다. 이래서 주말부부를 부러워하는구나를 실감한 순간도 있었다. 평일 축적한 체력으로 금요일에 만나면 출장을 다녀온 듯 반가운 마음으로 평소보다 신경을 썼다. 좋아하는 음식도 하고, 과일 하나라도 더 사서 평일에 부족한 영양분을 채워주려 노력했다. 보충할 수 없는 건, 커가는 아이들을 매일 함께 볼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에게는 아빠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점차 커져갔다.
뜻밖의 인사발령 소식은 놀라웠다. 남편이 본사 근무 대신 지역근무를 자원했다는 말을 했을 때,
"설마, 본사에서 한창 일 잘하는 당신을 지역으로 보내겠어? 난 아니라고 봐." 이랬다.
그런데, 설마가 막상 현실이 되니 둘 다 얼떨떨했다. 남편이 바라던 바인데, 우리 입에서 100프로 환호성이 터져 나오지 않았던 건 왜일까? 마음이란 게 참... 알 수가 없다. 램프의 요정인 지니가 남편의 소원을 들어준 듯했다. 소망이 바로 이뤄지는 때도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직원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조직인가, 그동안 열심히 일했느니 보상으로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마, 이런 걸까? 어쨌든 뜻밖에 원하는 결과를 얻었으니 감사할 뿐이다. 주말마다 KTX 타고 다니며 고생한 남편이 최소 1년 동안은 편안해지겠지. 본인도 지켜보는 나도 둘 다 새로운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온다. 내년부터 울산보다는 훨씬 가까운 곳으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으니까. 변화가 생기면, 적응해야 하고, 적응하면 지루해지고, 또다시 변화를 꿈꾸고 적응하고... 이런 패턴으로 살면서 인생은 굴러가기 마련일 테니.
남편의 지역발령 소식이 알려지자 카톡 메시지와 전화가 울려댄다. 축하인사와 함께 자신의 거처를 부탁하는 직원들의 메시지를 받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조금이라도 혜택을 보려는 사람들의 모습에 조직생활의 애환이 보였다. 과거 내 모습이 생각났다. 난 조직생활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10년 직장생활을 했어도 조직에서 승진과 인사발령이라는 연례행사를 겪지 않고, 거의 단독으로 일했다. 팀장의 고충은 잘 모른다. 그저 직원의 고충만 안다. 직장에서 나를 포함한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이 인사철에 긴장하고 윗사람들에게 부탁하러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참 불편했다. 내가 알던 사람이 그때만 되면 가면을 쓴 듯 평소와 다른 말과 행동을 보일 때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나는 저렇게 못하겠어. 그러니 조직생활을 잘 못하지. 이렇게 단독으로 일하니 참, 다행이다.' 일만큼이나 사내정치를 잘해야 살아남는 것이 중요해 보였다. 그게 삶의 정글을 살아가는 방식이지만 나는 선택받는 자와 남겨지는 자의 희로애락에 적응하지 못했다.
어느 누구도 조직생활이 편할리는 없다. 그저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피라미드에 갇혀 살아갈 수밖에 없겠지. 다행스럽게도 급속도로 변화하는 4차 혁명시대에 조직문화가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바뀌고 있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보인다. 또한 디지털 시대에 맞게 혼자 일하고, 조기 은퇴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과거보다 밥벌이의 선택지가 많아지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루종일 안개로 덮인 겨울비가 내리는 날, 남편의 발령소식에 마음만은 맑았다. 가족은 함께 살아야 된다는 생각에 함께할 수 있게 되어 좋다. 출퇴근길이 멀다 해도 일단 한 집에서 살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