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내가 버팀목이 되어줄게.
38살에 위암 선고를 받았던 엄마. 죽음의 두려움보다는 그때 당시 중학생이던 언니, 초등학생이던 나와 남동생 걱정이 먼저였다. 며칠 동안 어디 다녀올 거라고 하며 우리에게 오천 원씩 용돈을 주었고 그 당시 어렸고 엄마가 아파서 입원하는 줄 몰랐던 우리는 마냥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 우릴 보며 엄마는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엄마는 곱슬머리가 콤플렉스였던 한창 사춘기였던 언니가 머리를 펴달라고 졸랐었는데 팔 만원이 형편상 적은 돈이 아니었기에 해주지 못하다가, 죽어서 한이 될 것 같아 수술을 앞두고 머리를 해주었고, 혹시나 우리가 옷을 지저분하게 입고 다니진 않을까 새 옷 세 벌씩을 사서 준비했다고 한다.
38살 엄마에게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엄마 없이 초라하게 남겨질 우리였던 거다. 나는 그 당시에 엄마가 기억이 나는데 단 한 번도 우리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냥 평소 그대로의 모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우리가 똑같이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아마 엄청난 모성애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엄마는 육 형제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지금은 말도 안 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공부는 하면 안 된다는 할아버지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 이후로, 공장에 들어가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 어린 나이에 엄마는 돈을 벌어 집안 생계에 보탬이 돼야 했다. 참 아이러니한 건 막내 삼촌은 교육을 받아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는 선생님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경남 마산에서 살 때 엄마는 집 근처 공원에서 아이스크림과 솜사탕을 팔기도 했고 매일 집에서 부업을 했다.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생계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 교육 문제, 생계를 위해 내가 11살 되던 해, 외삼촌이 식당을 하시는 경기도로 이사를 왔다. 매일 식당 일을 마치고 밤 12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오고 또다시 아침에 일찍 나가고, 하루 12시간씩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우리 삼 남매를 키워냈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음에도 내가 배우고 싶고 하고 싶다고 한 것에 대해 한 번도 안 된다고 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어린 시절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한을 똑같이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서. 엄마는 가끔 할아버지 얘기를 할 때면 '배움의 싹을 뿌리째 뽑혀버렸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얼굴도 본 적 없는, 내가 태어나기 전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는 어린아이의 미래를, 꿈과 희망을 송두리째 뽑아 버린 거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자란,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엄마가 힘들 게 번 돈을 단 한 번도 쉽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침에 학교에 갈 때, 엄마가 가끔씩 용돈을 주더라도 괜찮다고, 필요할 때 달라고 하겠다고 안 받은 적도 여럿 있었다. 내가 이 돈을 받으면 엄마가 더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어린 마음에 그게 너무 싫었다.
고3 대학 진학을 준비하면서, 친구와 함께 논술학원을 알아보았던 적이 있다. 그 당시 한 달에 오십만 원이라는 논술학원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고 엄마에게 망설이며 얘기했는데 '민희야, 돈이 문제가 아니야, 지금 시기가 지나면 할 수 없는 건 돈이 얼마가 들던지 하는 게 맞는 거야'라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나는 엄마의 말에 논술학원을 등록했고, 논술전형으로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지금도 큰돈이 들어가는 일에 내가 걱정과 고민을 하고 있을 때면, 엄마는 이때처럼 얘기하곤 한다. 지금 당장 들어가는 돈보다는 미래를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고.
성인이 되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한 건 경제적으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나는 엄마가 그랬듯이 식당과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학교도 손 벌리지 않고,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영어강사로 일하며 돈을 벌어서 다녔다. 그렇게 자립해서 대학생활을 해나가면서도 엄마는 내가 정말 필요로 할 때는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미국 교환학생을 가고 싶다는 내 말에 단 한 번도 머뭇거림 없이 엄마는 다녀오라고 하며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나는 이런 엄마가, 초등학교만 졸업한 우리 엄마가 단 한 번도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엄마가 가끔씩 본인은 배우지 못해서 아는 게 많지 않다고 나에게 얘기하곤 하지만, 대학을 나온 다른 부모들처럼 그럴듯한 졸업장과 지식은 갖추지 못했을지언정 그들이 갖지 못한, 돈으론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삶의 지혜를 우리 엄마는 가지고 있다. 그 누구보다 책임감 있게 자식 모두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올바르게 길러냈고, 자신이 누리지 못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었고, 세상을 살아갈 때 보이지 않는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걸 나에게 알려준 사람이 바로 엄마다. 나는 엄마가 무척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
지금은 우리 삼 남매 모두 경제적으로 자립했지만 평생 일만 해온 엄마는 쉬는 것, 노는 것이 익숙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아닌 본인을 위해, 본인의 미래를 위해 일을 하고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요즘 행복하다고 자주 말하는 엄마를 보면, 45여 년이 지나서야, 외할아버지가 뿌리째 뽑아버렸던 어린 시절의 희망과 꿈을 비로소 싹 틔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거라면 이젠 내가 엄마를 위해, 그 새싹이 잘 자랄 수 있게 돕는 작은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