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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함께 괜찮아지길

모나르다가 있는 풍경


6월 한 달 동안 한시적 시골책방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프로그램이라 하지만 뭐 이렇다 할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은 아니다. 글쓰는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모닥불 놀이를 하고 하룻밤 자는 것이다. 어른들은 힐링의 시간, 아이들은 시골에서의 하룻밤을 묵는 것이다. 이곳은 차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온전한 자연 속이기 때문이다.

한 가족이 하룻밤 묵었다. 아는 사람을 통해서 온 친구였다. 밤 늦도록 모닥불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3년 전쯤, 어느 날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남편을 잃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 사내아이는 말했다. 

“저 한 부모 가정이에요.”

아이 엄마는 모닥불 속에서 숯을 꺼내 캠핑용 스텐 화로에 옮겨 담아 고기를 구워 아이에게 연신 먹였다. 모닥불 앞에 앉아 있다 보니 저녁을 제대로 먹지 않은 아이가 배 고플까 엄마는 전날 캠핑장에서 먹다 남은 고기가 생각난 것이다. 

스텐 화로의 숯불이 예뻐서, 엄마가 구워준 고기를 날름날름 받아먹는 아이가 예뻐서 나는 오래 그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처음 만난 이와의 대화가 두서없게 마련이지만, 그 친구와의 대화는 특히 그랬다.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 하는 듯한데, 이 말 저 말이 툭툭 튀었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이튿날 아침 다시 대화하면서 알았다. 

“헛되고 헛되도다, 그 말씀이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고요.”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그의 마음에 깊이 똬리를 틀고 있던 것이다. 마음은 아직 불같은 청춘. 그래서 이런저런 해보고 싶은 일도 많다. 그런데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그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성실한 직장생활을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어느새 몸은 예전 같지 않다. 

무엇보다 남편을 잃은 상실감이 아직도 크다. 이제 3년이니 그럴밖에. 그렇다고 누구에게 쉽게 그 이야기를 꺼내놓고 나 이렇다, 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주변 친구들이 그렇구나 위로하고, 이해해주지 않는다.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할 내 몫인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때 가장 듣기 힘들었던 말이 엄마는 강하다, 다 지나간다는 말이었지요.”

위로는 때때로 상처가 된다. 고마운 것을 알면서도 그 고마움이 와닿지 않는다. 사실 비통한 사람 앞에서의 위로는 무슨 말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 설사 내가 비통한 일을 겪었다 하더라도 당장 비통한 사람 앞에서는 위로의 말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냥 들어주는 것, 그냥 곁에 있어 주는 것, 그냥 기도하는 것이 전부다. 

오늘의 말은 어제와 달리 두서가 있었다. 하고 싶었던 말을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그냥 가만 들었다.     

텃밭에서 쌈 채소를 따서 얼음물에 담가 놓고, 올리브 오일과 아보카도 오일, 발사믹 식초로 소소를 만들었다. 닭가슴살도 얇게 찢고, 냉동실에서 산딸기도 좀 꺼냈다. 친환경 목장의 요구르트와 크루아상, 수박 그리고 커피를 곁들여 아침 식탁을 차렸다. 그가 이 한 끼로 기운을 차릴 수야 없겠지만, 부디 이곳에서의 하루가 그가 괜찮아지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그들이 떠난 후 음악을 크게 틀었다. 백건우 선생님이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이 현란하고 아름다운 음악이 나를 흔들었다. 그 유명한 변주곡 18번 안단테 칸타빌레가 나올 때는 잠깐 울컥했다. 

햇살 뜨거운 6월의 마지막 일요일. 큰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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