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무게
며칠 전 친구들과 스위스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나눈 적이 있다. 약 2000만 원의 비용만 있으면 스위스에서 안락사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병원에 가 내 손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락사는 익히 오래전부터 합법적으로 이루어져 왔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허용되지 않고 있다. 나는 타인의 큰 상처를 보는 것을 비롯해 내 몸에 난 심각한 상처를 보게 되면 말초 신경의 문제가 일어나는지 호흡이 가빠지고, 실신을 해 버리는 증상을 종종 겪곤 한다. 다른 사람의 아픔조차 시각적으로 보는 것을 버거워하는 나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유튜브가 나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오늘 아침에는 스위스 안락사를 선택한 일본 여성의 동영상이 알고리즘으로 뜨게 되었다. 이 주제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싶어 한 적도, 검색을 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난 무의식 중에 동영상을 클릭해 약 58분이라는 시간 동안 긴 울음을 쏟아내면서, 그녀가 견뎌내야 했던 무게를 몹시 버거워하면서 보았다. 요약하여 말하면 그녀는 점점 몸이 아파오는 희귀병을 겪고 있다고 한다. 약 56세의 나이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녀의 언니들이 그녀를 돌보아 주고 있었다. 노인이 되면 자식들의 짐이 되는 것만 같아 죄인처럼 살아가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58분이라는 시간 동안 ‘언니들의 짐으로 남는 것이 그녀에겐 아픔보다 고통스러웠던 것일까?’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무척이나 태연했으며, 불안한 감정 및 걷잡을 수 없는 공포는 그녀의 눈에서 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그녀의 안락사가 시행되기 하루 전, 언니들과 스위스 한 식당에서 저녁을 갖는다. 그리고는 안락사를 반대했던 동생과 통화를 한다. “나 안락사가 결정되었어. 내일이야.” 결코 그녀에게는 떨리는 목소리, 붉어진 눈시울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겪어보지 않아 두렵기만 한 죽음 앞에서 어떤 마음이길래 그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말을 하지만 정작 그 누구도 말을 한과 동시에 죽음을 겪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죽음 그렇다. 모두에게 처음인 것이다. 나는 종종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놓고 싶을 만큼 허탈해지지만, 간절히 행복한 마지막을 맞고 싶다는 생각으로 물음의 끝을 맺곤 한다.
“덕분에 행복했어.” 그녀 스스로 약물이 주입되는 버튼을 돌리고 언니들은 그녀를 쓰다듬으며 마지막을 준비한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모두에게 덕분에 행복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잠에 들 듯이 편안하고, 태연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을 기반으로 한 동영상이 자극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한 편으로는 놀라웠고 가슴 한편이 먹먹했다.
동영상을 시청하고 몇 달이 지난 지금, 그녀의 마지막 태연함이 때로는 나에게 용기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용기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모순이지만 작은 것에 연연하며 나를 갉아먹는 일이 익숙했던 나에게 역으로, 이 세상과 조금 더 멀리 한 발자국 떨어져 삶을 관조할 수 있게 하는 용기 말이다. 소중한 것들을 주머니에 가득 담아 놓고 언제 떨어질까, 사라질까 조바심 내지 않고 주머니를 훌훌 털며 살아갈 수 있는 마음 말이다.
이 새벽 모든 이들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회피의 수단이 되지 않길 바라며. 어쩌면 내가 쉽사리 공감하지 못할 그녀 혹은 모든 희귀병 환자들의 말 못 할 고통, 그리고 아픔. 죽음을 선택하기 전 수많은 새벽을 보내며 거쳤왔을 깊은 고뇌와 시간들. 모든 것을 온전히 공감할 수는 없겠지만 오늘도 나는 문득 그녀의 마지막을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