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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 Dec 04. 2022

욕망의 통제 그 사이 어딘가

행복이라는 소비의 모순  


언제부터였을까? 문득 재작년 크리스마스날 재테크와 관련된 책을 구매하기 위해 서점에 갔던 것이 기억난다. 방년이라는 나이에 세계 여행을 목표로 하던 나는 이립에 늦깎이 어른이 되었다. 또래보다 늦게 시작한 사회생활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발맞춰 돈을 벌어 차곡차곡 쌓아야 했고, '현실'과 '낭만'이라는 벽이 각자 점점 벌어져 그 사이에 있는 내가 떨어질 것만 같은 상황에서도 부단히 '현실'이라는 벽에 매달려야 했다. 조금씩 현실을 오롯이 마주하다 보니 내가 추구하던 무수히 많던 것들을 잃어가는 듯했다. 혹은 잃어야만 했다. 한 때는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이 모두 사회 탓이라는 유행어 아닌 유행어로 합리화하기도 했다.




내가 읽었던 재테크 책들은 말한다. 돈에 귀속되지 말고, 스스로 돈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라'라고 말이다. 대개 많은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 어리둥절 해 하던 내게 한 번 더 책은 '돈은 마음이 용납한 만큼 움직이는 것이다'라는 쐐기를 박았다. 또래보다는 늦은 나이에 미래를 위한 첫걸음을 준비해야 했던 나이기에 돈은 내가 우선시하던 모든 것들을 이겨버리는 수단이 되었다. 단 몇 백만 원을 들고 해외로 출국하던 나의 패기도, 용감함과 당당함만 있으면 모든 세계를 여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나의 젊음도, 현실보다는 낭만을 추구하며 늙어가는 삶을 선택하겠다던 나의 소녀심 가득하던 어린 시절도 모두 돈에 귀속된 것만 같았다. 돈은 그렇게 나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맨 우위에 자리 잡아 버렸다.


소비의 욕망에는 두 가지 패턴이 있다고 한다. '충동적 소비' 그리고 '중독적 소비' 말이다. 누군가는 진정 원하고자 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쾌락의 충동적 소비, 그리고 헤어 나올 수 없는 중독적 소비의 고리를 단칼에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최근 인상 깊은 신조어가 문득 떠 오르는데 바로 파이어족이다. 사전적 의미는 경제적 자립을 통해 비교적 보편적인 시기보다 빠른 시기에 은퇴하려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로 경제적 자립, 조기 퇴직(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이라는 뜻이다. 우연히 이와 관련된 미국 다큐를 본 적이 있는데 몇몇 미국인들 중 파이어족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개인, 혹은 가족 모두 소비 패턴을 바꿔갈 수 있도록 전문가가 직접 컨설팅을 해 주는 것을 다룬 내용이었다. 대체적으로 저축을 하지 않던 사람에게는 저축을 권했고, 평균 4인 가족보다 더 많은 생활비를 지출하는 가족에게는 식비에서 생활비를 줄일 것을 목표로 잡으라고 했다. 또한 하루 벌어 하루 살기 바쁜 한 청년에게는 N 잡을 찾아 부수입을 마련할 것을 권했고, 월급을 받지만 정작 생활비가 많이 남지 않아 고민인 주부에게는 고정 지출되는 계좌를 따로 만들어 관리하라고 컨설팅했다.


결론적으로 책과 동영상 모두 개인의 분수에 맞게 돈을 통제해야 비로소 원하는 삶에 가까이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론으로는, 가슴으로는 모두 알고 있는 내용으로 귀결되는 듯하다. 내 지출 내역을 뒤돌아 보니 나에게 소비는 행복과 만족감을 주는 소비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최후의 도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노년의 삶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이 모순이었다. 현재를 살아가는데 충실하며 미래를 그려가는 법을 이제야 배우기 시작한 나에게 작은 행복을 주는 소비는 현재를 더욱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되곤 하니 말이다. 그러나 회피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욕망과 중독 그리고 행복 그 어딘가 사이에서 지출되고 있는 돈의 출처를 밝혀 철저히 통제해야 한다는 사실은 조금은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삶을 고통의 연속이라고 말했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입장처럼 행복의 반의어를 불행이라 정의하고 이 둘을 같은 연결선상에 둔다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불행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닌 잠시 거리를 두는 것이 되겠다. 즉, 너무 멀리 행복으로 가 버리면, 오르막길을 오르는 나는 불행으로 가는 길에 빠른 가속도가 붙어 쉽게 도달하고 말 것이라는 말이 아닌가. 그러니 내가 소비를 통해 위로하고자 했던 나의 마음과 더불어 행복을 주는 것들에 대한 개인적인 의미 부여를 하나씩 거두어들여야겠다.  마음 한편에 긴 선을 그어 놓고 멀리로 이동해 다시금 바라보니 행복이라는 추상적 혹은 개인적인 공간 안에 너무 많은 것들을 넣어서 지고 가지도 못할 정도의 짐을 만들지는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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