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그리고 공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영어의 약자 중 ATM, TMI, URL, FAQ 등은 너무 익숙하게 생활에 스며들어 영어의 약자인지 모르고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나 역시 FAQ( frequently asked question), URL( uniform resource locator), ATM( automated teller machine) 등의 약자를 알지 못한 채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엊그제부터 몹시 추워진 날씨에 퇴근길 소스라치게 놀랐던 적이 있다. 급격히 하강된 기온 탓에 온 몸의 근육이 수축되는 것만 같았다. 잔잔하게 앓고 있었던 근육통도 기온 하강을 느꼈는지 자기들끼리 더 단단히 뭉치자고 발악하는 것만 같았다. 버스에서 내려, 뛰다시피 집 앞에 다다랐는데 마침 문 앞에는 며칠 전 주문해둔 퀼팅 패딩이 도착해 있었다. 집에 들어가 바로 장갑과 목도리를 출근 가방에 넣어 두고 주문한 옷을 입어보았다. 생각보다 짧게 배꼽까지 오는 길이에 솜으로 만들어져 근사하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두어 차례 옷을 입어보고는 나는 주저 없이 반품 접수를 했다.
그리고는 개운하게 씻고 잘 자리에 누워 바로 무릎까지 오는 롱 패딩을 검색했다. 급격히 불어닥친 추위에 적지 않게 놀랐던 모양인지 더 이상의 멋내기용 짧은 패딩은 불필요한 소비 같았다. 온몸을 휘감아 줄 수 있는 빵빵한 충전재와 더불어 목과 머리를 감싸줄 수 있는 세련된 털이 달려 있는 제품 위주로 빠르게 버튼을 눌러 스캔했다. 사실 작년에 보았던 라이브 플러킹을 당하는 거위 사진이 몇 초 스쳐 지나갔지만 나와는 별개인 일인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애써 그러고 싶었는지도. 몇 가지 후보를 담아두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다음날 출근길 어제와 비슷한 날씨 탓인지 버스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이 패딩을 모자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약 7분이라는 시간 동안 족히 50여 명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는데, 모두 패딩을 입고 있었다. 문득 우수수 쏟아져 나오는 패딩들의 오리털, 거위털들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지 궁금했다. 경제 시장 속에서 간편하게 금액만 지출하면 소유할 수 있는 이 무수히 많은 패딩 속의 털은 과연 누구의 옷이었을까. 출근해 후보로 담아두었던 패딩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충전재는 어떤 제품이 사용되었는지 구체적인 정보를 검색해 알아보았다. 그러던 중 거위털 80%, 깃털 20%라는 문구를 보고 거위의 사진이 불현듯 떠올라 수업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는 한걸음 물러나 이성을 찾고, 최소한의 노력 즉 조금의 죄책감이라도 덜기 위해 가학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생산된 패딩을 찾기 위해 윤리적 기업, 윤리 스포츠 브랜드, 동물 복지 기업 등을 검색했다. 내가 원하는 정보에 대한 내용은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RDS라는 약자를 기반으로 한 한 신문 기사를 보게 되었다. RDS(responsible down standard)는 '조류에서 털을 얻기 위해서 살아 있는 동물의 털을 뽑는 행위를 하지 않고 윤리적 방법을 통해 털을 채취 하여 만든 다운 제품에 발행되는 마크'라는 사전적 의미가 검색되었다. 우연히 이 주제와 관련된 기사문 한 편을 보게 되었다. 한 기자의 경험에 의하면 패딩을 구매하기 위해 백화점을 돌아다니면서 RDS 제품이 있는지 물었으나 대다수의 점원들은 그런 제품이 무엇인지 몰라 검색을 하거나, 오히려 어떤 제품이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검색을 통해 또 하나 얻게 된 정보로는 우리나라에서는 오리나 거위 털을 대체할 수 있는 충전재는 비싼 가격, 낮은 품질로 인식되어 각광받고 있지 못한다고 한다.
따뜻한 패딩, 멋진 디자인, 풍족하고 고급스러운 충전재를 사용해 만들어진 제품은 더할 나위 없이 빠르게 소비되곤 한다. 겨울철이면 이미 작년도부터 만들어져 있던 패딩들이 우후죽순으로 소비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거위털과 오리털은 %로 표기되어 그 양이 많을수록 더욱 비싼 가격으로 매겨진다. 추운 날씨 탓에 몸을 한껏 웅크리고 걸어가는 사람들 주위에 거위의 작은 비명이 들리고, 오리의 힘없는 날갯짓이 보이는 것은 왜일까. 불편한 진실을 피하고 싶은 내 마음이 끝없이 동요된다.
몹시 잔인하게도, 극단적으로 각인되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거위의 사진은 그저 소비자 한 명에 지나지 않던 나에게 RDS라는 의미, 그리고 기업과 제품을 찾아보게 해 주었다.
하루속히 온 세상의 패딩이 RDS 상품으로 생산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