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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산적 Oct 17. 2022

계속 산적으로 불러주세요

중학교에 올라가고 콧수염이 점점 진해지자 아빠 면도기로 몰래 처음 면도를 했다. 이곳저곳 베이며 이렇게 아프고 어려운걸 평생 어떻게 하고 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면도하는 모습을 부모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부모님의 눈치를 살피며 몰래하던 면도 덕에 그 당시 나는 콧잔등에 거뭇거뭇한 상처를 한동안 달고 살았다.


그맘때 즈음 작은 대안학교로 전학을 갔다. 학교 규모가 원체 작아서 아침이면 모든 학년이 강당에 함께 모여 조회를 했었다. 떨리는 등교 첫날 그 강당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몇 학년 위에 형이 나를 보며 대뜸 산적이라고 불렀고 그렇게 나는 산적이 되었다. 처음 오는 학생에게 떠오르는 인상을 말하는 것이 하나의 놀이었던 것 같다. 뒤이어 들어왔던 지금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있는 둘은 비슷한 방식으로 모기와 킹콩이 되었다.




사춘기의 절정이었고 가리고 싶었던 거뭇거뭇한 콧잔등 상처에서 비롯된 별명이었기에 처음 산적으로 불리는 일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빨리 내게 붙여진 이 이름이 시간 속에 사라지길 바랐다. 하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이름이 가진 힘은 컸다. 학교에서는 저마다의 인상에 기인해 짧게나마 불린 이름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 이름들 중 '산적'은 쉽게 사람들 뇌리에서 가시지 않는 이름이었던 것 같다. 우리 셋에게는 이것이 운명이었는지 끝까지 불리고 살아남은 이름은 산적, 모기, 킹콩뿐이었다. 가지고 있는 의미와는 달리  '산적' 이 지닌 느낌과 그 말의 맛은 생각보다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서서히 "산적아!"라고 불리는 것이 익숙해졌다. 나의 면도기를 갖게 되었고 깔끔하게 상처 없이 면도를 할 수 있어 멀끔한 콧잔등이 자리 잡은 후에도 나는 내 친구들에게 여전히 산적이었다.


가장 즐거웠던 시기에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이 불러주는  이름으로 나의 중고등 학창 시절을 보냈다.   이렇다  연고도 없는 미국으로 대학을 갔다. 그곳에서는 나의 다른 이름을 아는 이는 없었다. 구태여 나를 산적이라 불러달라는 이상한 부탁을  민망한 상황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렇게 어울리지도 않고 어색하기만 했던 Paul이라는 영어 이름으로 새롭게 만나는 이들에게 나를 소개하곤 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내가 애정하는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이 점차 줄어들었다.


내가 산적이었단 사실이 무뎌질 때 즈음 고등학교 후배 하나가 내가 다니던 대학으로 진학을 했다. 작은 규모의 학교였기에 학생 모두 선후배 관계없이 두루 친해질 수 있었던 구조의 고등학교였지만 그렇다고 아주 막역하게 가까웠던 친구가 아니었기에 다시 만났을 때 어색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그 친구가 미국 땅 그 넓은 캠퍼스 거리에서 나를 발견하고 "산적 오빠!"라고 부르며 반갑게 다가온 일이 있었다. 확실히 그 이름이 내게 주는 편안함이 있었다. 잠시나마 가졌던 걱정은 금세 필요 없던 일이 되었고 그 후배는 대학 시절 내가 의지 할 수 있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산적이란 이름에 애착을 갖게 된 이유는 위에 말했든 가장 즐거웠던 시기에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를 불러주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이름과 멀어지다 가까워지다 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항상 김산적의 이름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속 산적이면 좋겠지만 나의 본명이거나 또 다른 별명일 수도 있는 앞으로 불려질 나의 이름들이 계속 산적처럼 편안함과 그 속에 많은 추억을 담아낼 수 있는 이름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앞으로의 이름들이 부디 산적 같았으면 한다.


요즘 내게 가장 즐거운 일은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며 멀어졌던 이 이름과 다시 가까워졌고 이 이름으로 내가 얻은 추억과 했던 결심을 다시 마주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이들도 자신이 애정하는 이름의 소유가 주는 즐거움을 만끽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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