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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산적 Sep 04. 2022

안 그랬던 애가 왜?라는 책망

영악했던 건지 어려서부터 그런 상황을 많이 지켜봐 와서였는지 선생님들이 신뢰하는 학생은 혼나야 할 것도 덜 혼나고 이룬 것에 비해 과한 칭찬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그들은 일명 왈가닥이거나 순수했지만 크고 작은 사고를 수시로 만들어 냈다. 때문에 나는 아등바등 있는 노력 없는 노력 모두 쏟아가며 어른들의 인정을 얻을 필요 없이 조용히 중간 정도의 노력만으로 비교적 쉽게 모범생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때의 나는 고분고분하고 말썽이 적은 학생이었다. 성적도 아주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준수했고 오랜 기간 학생임원을 맡으며 어느 순간부터 내가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 내게도 작은 일탈의 기억들이 있다.


한 번은 신종플루가 한창이었을 때 학교에서 수업을 조기 종료하고 학생 모두가 집으로 일찍 돌아간 적이 있었다. 수업도 일찍 끝났겠다 그대로 집에 돌아가기 아쉬웠던 나와 친구들은 곧장 PC방으로 향했고 저녁시간이 돼서야 집에 돌아갔다. 학교 입장에서는 일찍 돌려보낸 학생들의 행방이 묘연해졌기에 상당히 난처했을 것이다. 다음날 나와 친구들은 교무실에 불려가 호되게 혼이 났다. 또 하루는 학교급식 반찬이 너무나 실망스러워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닌 날이었다. 한참을 궁시렁거리다 정말 이건 못 먹겠다며 친구 여럿과 학교 앞 왕갈비 집에 가서 갈비탕을 사 먹고 돌아온 적이 있다. 점심시간에 학교 앞 슈퍼에 다녀오는 일이 우리 학교에서는 용인되었는데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사안을 가볍게 받아들였지만 문제가 상당히 커졌다. 학생들이 무단외출을 한 일이었고 학교 급식실태가 학부모 입방아에 오르내릴 수 있는 일이었다. 당시 선생님들은 아마 우리가 참 많이 원망스러우셨을 것이다.


두 일화에서 나는 동일한 소리를 선생님들로부터 들었다.

"안 그랬던 애가 왜 그랬느냐"

"네가 그럴 줄은 몰랐다" 같은 부류의 말이었다.

함께 잘못한 친구들은 한 번의 꾸지람으로 끝이 났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따로 선생님들을 마주칠 때마다 내게 느낀 자신들의 실망감을 표현하셨다. 한 번의 훈육이나 꾸지람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그 상황이 정말 싫었다. 그러면서 모범생이라고 덜 혼나느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이 나타내는 실망감에 지속적으로 죄송함을 표해야 하는구나를 느꼈다.




지금껏 살아오며 나도 그때의 선생님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 일들을 경험하며 느꼈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할 때면 나 역시 더욱 크게 실망했고 더 큰 서운함을 느꼈다. 우리가 신뢰하는 사람들로부터 실망을 느낄 때면 왜 그 선택을 이해하고 참작하기보다 실망감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일까? 오랫동안 비슷한 여러 상황에 놓이다 보니 나는 그것이 우리의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내 주위 어른들은 모범생이 사고를 치는 일, 믿었던 아들이 담배를 피우는 일등을 보았을 때 더 모질게 말하고 더 크게 책망했다. 자신이 알고 신뢰하던 모습을 부정당했다고 느꼈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들 앞에서 나의 모습을 숨기고 감추며 위선을 떨지 않았다. 늘 나는 나였다. 다만 나에게서 그들이 보지 못한 모습 혹은 보지 않으려 애쓰던 모습을 보고 말았을 때 그들이 느끼는 배신감이 나에게 향하는 책망에 더해졌다. 나는 화가 나거나 서운함을 느끼면 오히려 말이 없어지는 성향의 사람인데 나에게 특별 하다고 믿는 친구들이 실망감을 줄 때면 더욱 오래 나의 입을 닫곤 했다. 나 역시 내 친구들이 한 잘못 이상으로 그들에게 서운함을 표했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의 모습이 전부일 것이란 착각이 서로를 더욱 아프고 상처받게 한다. 결코 타인의 전부를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니 신뢰를 주고받던 상대에게 실망과 상처를 느끼더라도 딱 그 사실만큼만 상대를 책망하자. 내가 알던 모습이 부정당했다며 그 배신감을 그 책망에 담아 상대를 상처 주지 말자. 그것은 상대의 잘못 보다 내가 상대를 다 알고 있다는 오만이라는 스스로의 잘못이 더 클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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