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익을수록 고개가 빳빳하다
때는 팔 년 전. 스무 살 새내기였던 그 동생은 낯가림 탓인지 두 살 많은 나를 굉장히 어려워했다. 처음으로 몇 다리를 건너도 초면인, 홀로 바닥부터 일구어야 형성되는 관계 투성이라 그렇겠거니 했다.
인사도 꼭 깍듯하게 했다. 나를 발견하면 멀리서부터 웃고, 가까이 다가오면 자리에 우뚝 멈춰서 허리를 구십 도로 숙였다. '언니, 안녕하십니까. 좋은 하루입니다.' 하면서. 그 아이는 모두에게 그랬다.
비록 낯가림은 며칠 가다 말았으나, 깍뜻한 인사는 내내 지속되었다. 지금은 꽤나 편해졌는지 특유의 버르장머리로 뻗대며 나름의 하대를 선보이지만, 본성을 알기에 마냥 귀엽기만 하다.
귀한 인품 덕분에 현재까지도 그 동생과 만나는 날이 가까워져 오면 미리 행복해진다. 설설 다가오는 모습이 시야에 담기는 순간부터 즐겁다.
새해 목표로 ‘큰소리로 활기차게 인사하기’를 삼을 만큼 살가움이 박했다. 주제넘게 변화를 주고 싶었다. 이직한 지 막 사 개월 됐을 무렵이다.
혼자만의 미션을 수행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결국 무관심에 굴복당했다. 며칠은 못 들었나 했고, 며칠은 바쁜가 했으나 패기보다 패배 시인이 현명했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마지막 남은 나의 활기였다.
'할 사람만 하는 인사'에 익숙해진 나는 우연히 옆팀(말이 옆팀이지 옆자리) 팀장님의 출근을 목격했다. 종종걸음으로 입장하는 그를 보며 진배없이 쏠랑 가 앉겠거니 싶었다.
그녀의 행보는 내 예상을 뒤엎었다. 본인 자리를 쓱 지나 대표님, 본부장님 앞에 멈춰 섰다. 그들과 직접 마주하고 인사 올렸다. 충격적인 전개에 얼이 빠졌다.
인사가 가장 중하다던 나는 입만 바빴고, 정작 그는 별 일 아니기에 태연했다. 자리로 돌아오며 우릴 보고 밝게 인사했다. 낯부끄러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스스로 돌아봤다. 그럴 용기까진 없었기에 결국 똑같은 사람이길 택했다. 대단한 노력이라도 한 것마냥 정당성을 부여하며, 꼴사납게 사람 가리는 짓을 했다.
어제 같은 오늘에서 만나는 유일한 반가움. 진심이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있기에 또 깨닫고야 만다.
모든 이가 동일한 관념을 가질 수 없다. 더러는 으레 주고받는 형식적 행위를 굳이 언어로 치환하여, 필요 이상의 개념을 부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게 뭐 대단한 거냐며.
물품과 금전, 시간을 베풀면 봉사가 된다. 그저 '마음'뿐인 건 가치가 없고 유약하다. 모든 나눔은 현물보다 '주고 싶은 마음'이 근간이 되는 법인데.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고개를 숙이고, 양보한다. 사과나 배려에 열등감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타인을 얕잡는 습관 같은 게 없어서인지, 자격지심을 몰라서인지 자존감이 높다. 좋자고 하는 일에 '굳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 너 여기 뭐 묻었다. 뻥이지롱. 인사 잘 한다.
어릴 적 툭하면 걸어 재낀 장난질이 떠오른다. 여차하고 고개 숙였다간 웃어른마냥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친구에게 속아 조아렸다는 사실 자체로 굴욕감 느끼던 시절.
'웃어른께 인사합시다'라며 주입된 도덕성 때문일까, 행동에 담긴 의미를 알아서 그랬던 걸까.
그도 아니면 유치한 장난에 발끈할 기력조차 없는 어른이 된 걸까, 존중의 마음이 사그라들게 된 걸까.
부여할 의미가 없으니 부재하게 된다. 나 또한 그렇게 자라고 있으니 자각하면 한심할 뿐이다. 배울 것을 상정해 두고도 이성과 이상이 대립한다.
오로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사람답게 만든다. 낮은 곳보다 나은 곳을 향해 가야겠다.
다양한 군상 덕에 오늘 또 하나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