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에게
작가라는 걸 잊고 살았어. 이런 게 절필이려나 주제넘은 생각도 들었는데, 짧은 한 줄 적을 정신머리가 부재한 탓에 대충 웃어 보이고 넘겼어.
브런치도 글 좀 쓰라고 눈치를 준다. 이런 마음가짐으론 아무것도 전달하고 싶지 않은데 어떡하니.
그래서 너에게 편지를 써 보려고 해. 내 근면함의 근간은 너였으니까. 모나미 펜으로 가계부를 꾹꾹 눌러 적던 뒷모습을 떠올리며 투정이나 실컷 부릴까 봐. 엄마한테는 말을 못 하거든.
원래 같으면 레이스 커튼 사이로 볕이 들어. 오늘처럼 어제와 다른 날은 괜히 서운해진다. 아무래도 나는 흐린 날과는 영 아닌가 봐.
베란다 구석에 너부러진 삼단 접이식 우산을 멀뚱히 봤어. 최근에 갑자기 비가 쏟아진 적 있거든. 예측을 못 하니 대비라도 해 볼까 부러 휴대용으로 구비했지.
고민 끝에 빈손으로 나왔어. 어플에는 비 소식이 없었거든. 현관을 나서자마자 버스 시간표를 띄운 액정 위로 물방울들이 퐁퐁 내려와 앉더라고.
우산이 아니라 창밖을 유심히 볼걸 그랬어. 피하는 데 젬병인 게 맞는 건지, 그래서 여태껏 학습 안 되는 건지 싶어.
꼭 '운수 좋은 날' 같더라. 양말 꺼내려다 서랍에 코를 박았고, 3분 후면 세 대가 연달아 정차하는 정류장이 11분을 안내했어. 공들인 머리는 막 눈 떴을 때보다 더 부스스해졌고, 건물 엘리베이터는 열리는 족족 만원이라 대충 여덟 대쯤 먼저 올려 보냈어.
시작이 너무 구깃거려서. 어제의 나는 운이 참 좋다며 콧노래를 불렀는데 말야.
순이야, 최근에 내 환경이 한꺼번에 변했다. 그때 만나서 대충 설명해 주기는 했는데, 잘 기억 안 나지. 예상했던 것보다 더해. 손바닥 뒤집듯 훌러덩 변화했어.
그래서인지 보름이 넘어가도록 24시간 내내 각성 상태야. 남의 집, 남의 직장. 있으면 안 될 공간을 비집고 온 듯해. 어디서든 자유로운데, 어디서도 자유롭지 못해.
아, 이사한 집은 정말 마음에 들어. 너도 와 보면 참 좋을 텐데. 아니다, 나 몰래 다녀갔으려나.
그 집에서 한 거라곤 출퇴근밖에 없어서인지 밤이 되면 다시 나갈 아침이 두려워진다. 언제쯤 긴장이 완화될 수 있을까. 네가 없는 공간은 이미 익숙한데, 너를 떠올려야 안정이 오는 건 해가 쌓일수록 더해.
다사다난한 오전을 나고, 겨우 한숨 돌리며 커피 내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화투패로 운이나 맞춰 볼까 보다.
나란히 앉아 가르쳐 줬잖아. 그때는 오늘의 운을 미리 떼어 본다는 게 대단한 의미가 있나 싶었는데, 이리 커 보니 인과가 정반대야.
그거라도 잘 떨어지면 나의 오늘에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긍정을 주나 봐. 그게 운을 부르나 봐.
순이야, 나는 너와의 추억에 자꾸 기대고 싶은지 매개체에 집착하게 된다. 언젠가부터 화투를 모으게 됐어. 여행지에서 사면 지역만의 고유한 것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게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나는 제주에서 산 게 가장 마음에 들어. 대단한 건 아니지만 다시 만나게 되면 꼭 보여줄게.
주절주절 떠들었더니 날이 개어 간다. 내일은 다시 맑을 거라네. 나는 예보를 맹신하는 편이니까 또 한 번 속아 주려고.
오늘은 나보다 네가 더 많이 웃는 하루였으면 좋겠다. 종종 편지할게. 건강 잘 챙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