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9편 : 박두순 시인의 '향수'
@. 오늘은 박두순 동시인의 동시를 배달합니다.
향수
박두순
욕실에 향수를 뿌리려다가
향수병을 떨어뜨려 박살이 났다
향수는 하수구로 몽땅 흘러 들어갔다
향수가 다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역한 냄새만 올라오던 하수구에서
며칠 동안 향수 냄새가 올라왔다
진짜 좋은 냄새는 역한 데서 살아난다
냄새 좋은 사람도
어느 곳에 두어도 냄새가 날까
죽어서 더 향기로운 사람이 있다
50년 넘게 앉아서 잠자고 세상 떠난 스님의
사진과 일생이 신문 한 면을 가득 메웠다
며칠 동안은 세상 역한 냄새가 덜 났다
봐라, 그가
깨어진 향수병이었다
- [들꽃](2009년)
#. 박두순 시인(1950년생) : 경북 봉화 출신으로 1977년 [아동문예] (동시)와 [자유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대구교대를 나와 초등교사로 근무하다가 [소년한국일보] 입사한 뒤 동시와 동시평론 등 아동문학 발전을 위해 노력.
<함께 나누기>
요즘 나오는 동시 가운데 누가 읽어도 이건 동시구나, 아니구나를 판단할 수 있는 시가 있는 반면, ‘어 이것도 동시인가?’ 하고 고개 갸우뚱할 작품도 있습니다. 오늘 시도 동시인가 일반시인가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씀드리지요. 아이들이 읽어도 좋고, 어른이 읽어도 좋은 시라고.
시로 들어갑니다.
욕실에서 목욕을 한 뒤 향수를 뿌리려다 향수병을 떨어뜨려 박살이 났습니다. 이미 향수는 하수구로 몽땅 흘러 들어갔고. 당연히 향수가 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웬일일까요, 역한 냄새만 올라오던 하수구에서 며칠 동안 향수 냄새가 올라왔습니다.
“진짜 좋은 냄새는 역한 데서 살아난다 / 냄새 좋은 사람도 / 어느 곳에 두어도 냄새가 날까”
연꽃이 아름다움은 더러운 진흙 뻘탕에서 피어나기 때문이다는 말을 듣습니다. 다른 꽃들과 달리 더러운 곳에서 이쁜 꽃을 피운단 뜻이겠지요. 영웅이 난세에 등장하고, 정말 존경받을 사람은 험지(險地)에서 향기를 내뿜고 꽃을 피웁니다.
“죽어서 더 향기로운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이 며칠 동안 신문을 가득 메우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종교인으로 특정 종교와 관련 없다면 그냥 넘길 텐데. 50년 넘게 앉아서 잠자고 세상 떠난 스님의 사진과 일생이 신문 한 면을 가득 메웠습니다. 또 그분의 말씀도 세상을 뒤흔들었습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봐라, 그가 / 깨어진 향수병이었다”
시를 다 읽으면 깨어진 향수병 같은 분이 누군지 궁금할 겁니다. 다만 예순 넘은 이들은 다 알지요, 성철 스님을 두고 한 말임을. 며칠 동안 세상 역한 냄새를 지워주셨던 분, 아마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절로 옷깃을 여몄을 겁니다.
아주 오래전 신라 고려 조선시대로 올라갈 필요 없이 우리나라엔 존경받는 종교인들이 꽤 됩니다.
불교계에선 10년 장좌불와(長座不臥 : 오랫동안 눕지 않은 채 앉아 도를 닦음)하여 도를 얻은 오늘 시에 나온 성철 스님, 많은 이들에게 좋은 말씀을 글로 전하다가 특히 무소유(無所有)의 정신을 일깨운 법정 스님.
가톨릭에선 최초의 추기경이면서 수십 년간 군부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김수환 추기경님, 남수단 '톤즈'에서 봉사활동을 펼치다 하느님 품에 안긴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 마 톤즈]의 주인공 이태석 신부님.
개신교에선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독립운동가인 주기철 목사님,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로 종신형 선고받고 출옥 후 나병환자를 위한 전도자로 일생을 바친 손양원 목사님.
이밖에도 깨어진 향수병 같은 분들은 비록 종교인이 아니어도, 내가 믿는 종교가 아니어도 존경받으며 그 귀한 이름을 이 땅에 남겼습니다. ‘깨어진 향수병 같은 사람’이 귀한 세상입니다. 어느 곳에 두어도 변함없는 진짜 좋은 사람 냄새를 맡고 싶습니다. 단 며칠만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