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0편 : 이산하 시인의 '불혹'
@. 오늘은 이산하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불혹
이산하
백조는
일생에 두 번 다리를 꺾는다
부화할 때와 죽을 때
비로소 무릎을 꺾는다
나는
너무 자주 무릎 꿇지는 않았는가
- [문학동네] (2001년 겨울호)
#. 이산하 시인(1960년생, 본명 '이상백')은 경북 포항 출신으로 1982년 동인지 [시운동]을 통해 등단. 부산 혜광고(3년) 재학 시절, 대구 대건고(2년) 안도현과 함께 우리나라 고교 백일장을 반씩 나눠 가질 정도로 뛰어난 문재(文才)를 보임.
1987년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장시 「한라산」 필화사건으로 구속된 뒤 절필했다가 31년만인 2018년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복귀했는데 현재 대장암으로 투병 중으로, 시인들이 앞장서서 치료에 보태 쓰라고 미리 조의금을 모은다고 함.
<함께 나누기>
나이에 따른 공자님의 정의를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15세를 지학(志學 : 배움에 뜻을 둠), 30세를 이립(而立 : 삶의 목표를 세움), 40세를 불혹(不惑 : 삶의 이치를 터득하여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음), 50세를 지천명(知天命 : 하늘이 내린 뜻을 앎), 60세를 이순(耳順 : 남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임), 70세를 종심(從心 :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감).
그러니 불혹이라 함은 ‘삶의 이치를 제대로 터득하여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입니다. 화자는 이 나이에 이르러 비로소 부끄러움을 알고 지난 일들을 뉘우칩니다. 살다 보면 후회스러운 일들이 참 많지요.
내 주장을 꺾지 않고 꼿꼿하게 살아야 함에도 먹고살기 위해 무릎을 꿇고 살아야 했던 일들을 하나둘 떠올리는 순간 그 일이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목숨 걸고 독립운동하셨던 분들,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 감옥살이 하셨던 분들, 위기에 빠진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던 분들,
이런 분들을 생각하면 나만 잘 살기 위해, 조금 더 재물 챙기기 위해, 이름 더 날리기 위해 양심을 저버리고 했던 일들이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오늘 시는 비록 그 길이가 짧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깊이마저 얕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압축시킨 만큼 더 깊어졌다고 봐야 하겠지요.
“백조는 / 일생에 두 번 다리를 꺾는다 / 부화할 때와 죽을 때 / 비로소 무릎을 꺾는다”
사내들은 어릴 때 이와 비슷한 얘기 들으며 자랐습니다.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울어야 한다.’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돌아갔을 때, 나라를 잃었을 때. 백조를 사람에 대입하면 이렇게 되겠지요. ‘사람은 일생에 딱 두 번만 무릎을 꿇어야 한다.’ 잘못을 빌 때와 뜻을 관철하기 위해 잠시 후퇴하려 할 때.
“나는 / 너무 자주 무릎 꿇지는 않았는가”
시인은 화자의 입을 빌어 너무 자주 무릎 꿇었다고 고백하지만 사실은 읽는 이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당신도 너무 자주 무릎 꿇지 않았나?’ 하고. 가장 소중한 젊은 한때를 구속당해 입과 발이 묶였던 시인의 일생과 관련 지으면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은 훨씬 더 자주 무릎을 꿇어야 할 듯.
저도 살면서 참 많이, 그리고 자주 무릎 꿇으며 살아왔습니다. 어떤 땐 하루에도 몇 번씩 무릎 꿇으며 거기에 변명까지 하며 살았던 적도 있습니다. 헌데 묘한 건 무릎 꿇음이 잦아질수록 부끄러움이 늘기는커녕 줄어들다가 나중에는 부끄러움으로 아예 인식조차 않게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지조를 잃음도 무릎 꿇음이요, 정의를 외쳐야 할 때 침묵함도 무릎 꿇음이요, 잘못을 인정 않고 주저리주저리 변명함도 다 무릎 꿇음입니다. 변명보다 제 잘못을 인정하고 무릎 꿇음이 더 낫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가 아니라 ‘내가 한 잘못이니 내가 책임진다’라는 말이 훨씬 더 빛나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무릎 꿇음’은 부정의 의미를 갖습니다. 허나 가끔 무릎 꿇음이 의지의 실현이라는 긍정의 의미를 담기도 합니다.
1970년 12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추모비 앞에서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가 헌화를 하던 도중 갑자기 무릎을 꿇었습니다. 나치 독일에 의해 희생된 폴란드 유대인들에게 올리는 진심 어린 사죄였는데, TV를 통해 이 모습을 지켜보던 유럽인들, 특히 폴란드의 유대인들은 독일에 대한 증오심을 많이 삭히게 되었답니다.
어느 시인은 숲속과 들, 늪지에서 야생화를 만나면 무릎을 꿇고 마치 그의 이름을 불러주듯이 시를 쓰고 사진을 찍었다고 합니다.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은 자기보다 키 작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무릎 꿇음은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진심을 담아 호소하는 무릎 꿇음이 많아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