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초와 아삭이고추

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9)

* 땡초와 아삭이고추 *



지난 봄, 아내가 전통시장에 가서 고추 모종을 사 왔다. 우리는 고추를 많이 심지 않는다. 김장에 쓸 고추는 손윗동서 댁에서 필요한 만큼 주니까 바로 따서 된장에 찍어 먹을 만큼만 심는다. 내가 매운 걸 워낙 싫어해 주로 '아삭이고추'를 심지만, 그래도 음식에 매콤한 맛을 내야 하는 때 넣을 ‘땡초’도 몇 포기 심는다. 여름날 텃밭에 나가 풋고추 한 움큼 따서 된장에 찍어 이름 그대로 ‘아삭아삭’ 한 고놈을 씹어 먹으면 임금님 수라상이 부러울까?


우리 부부는 나름대로 분업화돼 있다. 땅 고르고 비닐 덮고 고춧대 세우기까진 나의 몫, 심는 일은 아내가 한다. 심으라고 한 뒤 모종을 텃밭에 옮겨주고 돌아서는데 아내가 전화를 받았다. 아랫집 할머니께서 내려오라는 전갈. 아마도 봄나물 주시려는 듯. 남은 고추 모종은 땡초 다섯 그루 말고는 다 아삭이인데 그대로 두고 일어서려다 저대로 햇빛 받으며 둘 게 아니라 몇 포기 안 되니 ‘내가 심지’ 하며 그냥 심었다.


모두 서른 포기쯤 되는 고추를 두 줄로 다 심었을 즈음 아내가 들어와 보더니,

“아이구, 아삭이랑 땡초랑 붙여 심으면 안 되는데...” 하는 게 아닌가.

“아니 왜?”

“아삭이랑 땡초랑 붙여 심으면 아삭이가 좀 매워져요. 매운 건 못 먹잖아요.”

무슨 소린가 했다. 아삭이랑 땡초랑 서로 줄기가 다른데 어떻게 옆에 심는다고 해서 맵지 않은 고추가 매워진단 말인가. 나는 말 안 되는 소리라 했고 아내랑 내기를 걸었다. 승리를 자신하며. 결론은 ‘내가 졌다’


9-1.png (아삭이 중 '미인고추')



고추는 '자기꽃가루받이' 즉 '자화수정' 작물이다. 자기 꽃에서 꽃가루를 받아 수정되는 식물이란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고추가 자기 꽃에서 꽃가루받이로 수정되는 확률은 대략 70%밖에 안 되고, 나머지 30%는 다른 꽃의 꽃가루받이를 통해 열매가 맺힌단다.

따라서 매운 고추와 안 매운 고추를 같이 섞어 심으면 두 꽃가루가 서로 섞이게 되어 매운 고추는 덜 맵게, 안 매운 고추는 맵게 변할 수밖에 없다. 결국 30%가 섞이는 이런 현상 때문에 땡초와 아삭이를 함께 심으면 안 된다는 이론.

논쟁에서 이긴 아내가 땡초만 다시 뽑아 토마토 심은 곳으로 옮겨 심었다.



중국 서진(西晉)의 학자 부현이란 사람이 쓴 책에 ‘근주자적(近朱者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말이 나온다. 직역하면 ‘붉은 인주를 가까이하면 붉게 물들고, 검은 먹을 가까이하면 검게 물든다’는 뜻인데, 그 속뜻은 ‘좋은 친구를 사귀면 좋은 사람이 되고, 나쁜 친구를 사귀면 나쁜 사람이 된다’로 해석한다.

비슷한 말로 성악설을 내세운 순자의 말씀을 모아 편찬한 [순자(荀子)]란 책에 '마중지봉(麻中之蓬)'이라는 사자성어도 나온다. 글자 그대로는 ‘삼밭의 쑥’이지만, ‘곧은 삼밭 속에서 자란 쑥은 곧게 자라는 것처럼 착한 사람과 사귀면 그 감화를 받아 자연히 착해진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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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근주자적'이나 '마중지봉'이나 착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착해지고 그 반대면 나쁜 인간이 된다는 말이다.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분들이 한 말이니 분명 옳으리라. 그런데 요즘 이 말에 의문이 생긴다.

이 말대로라면 착한 사람은 착한 사람끼리,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끼리 어울려라는 말이다. 즉 '자기와 통하는,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어울려야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사람이 살면서 착한 사람 하고만 어울릴 수 있다는 말인가. 또 ‘착하다’ ‘나쁘다’는 말은 얼마나 주관적인가?


이제 나이가 좀 드니 어떤 사람을 평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다. 젊었을 때는 몇 가지만 보고 '아, 저 사람은 괜찮은 사람', '아, 저 사람은 나쁜 사람' 하고 판단했다. 그런데 이제 그럴 자신이 없다. 괜찮게 보았던 사람이 전혀 그런 인간이 아니고, 그렇지 않게 보았던 사람이 좋은 사람임을 볼 경우가 잦으니 말이다.


현재의 우리 사회는 어느새 두 가지 중 한 가지 선택만을 강요하고 있다. 만남의 자리라면 대선 정국이라 정치 얘기가 꼭 나온다. 그런데 누가 국민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할 사람인가보다 진보인가 보수인가, 내편인가 저쪽 편인가에 더 관심 많다.

내편이 아니라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배척하고 내편이라면 그의 허물은 사라진다. 그러니 늘 말다툼이다.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사람은 설 자리가 없다. 어중간한 사람, 중간에 서고픈 사람, 빨간색과 검은색이 조금씩 섞인 사람, 더더욱 무지개처럼 여러 빛깔이 섞인 사람은 대우받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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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초와 아삭이를 따로 심으면 각각의 성격을 지닌 고추가 되지만, 붙여 심으면 땡초는 약간 덜 맵게, 아삭이는 약간 더 맵게로 변한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에 붙어 완전히 맵거나 완전히 맵지 않거나 하지 않는다. 즉 한쪽이 다른 한쪽의 특성을 다 갖고 가진 않는다. 매운 고추와 맵지 않은 고추를 그냥 놔두면 아주 매움에서 약간 덜 매운 고추가 나오고, 아주 맵지 않음에서 약간 매운 고추도 나온다.


사람도 이렇게 섞여 살아야 하지 않을까. 왜 우리나라엔 매운맛 나는 사람과 안 매운맛 나는 사람만 살아야만 할까? 매운맛 나는 사람, 약간 덜 매운맛 나는 사람, 아주 조금 매운 사람, 전혀 맵지 않은 사람이 섞여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아내 몰래 나쁜(?) 짓을 했다. 아내는 땡초와 아삭이 둘을 분리시켜 떼어놓았는데 그 가운데 세 포기를 옮겨다 함께 붙여 심었다. 나중에 익어 먹게 되면 아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분명 이러리라.

“이상하네. 분명 아주 매운 땡초 달라고 해서 심었는데... 왜 이리 맵지 않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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