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10)
달이 떠올라 냇물에 비치면 마치 달빛이 냇물을 따라 흐르는 듯이 아름답다 하여 '달내마을'이라 이름 붙여진 마을 맨꼭대기 집에 '태백'이란 개가 살고 있습니다.
태백이는 풍산개인데, 주인아저씨가 북녘 땅에서 높고 거친 산맥을 헤치고 달리며 산짐승을 쫓던 그의 조상을 생각하며 붙여준 이름입니다. 태백이가 달내마을에서 생활한 지 이제 열세 해가 됩니다. 그러니 열세 살이고 사람으로 치면 할머니뻘입니다.
오늘도 태백이는 마을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집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보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떤 사람이 돌아다니는지, 어느 집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지 다 보입니다. 낯선 사람이 방문하면 짓는 게 태백이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일 년 중 가장 춥다고 알려진 절기인 대한과 소한을 지났건만 춥기는 마찬가집니다. 사람도 겨울이 힘들 듯이 태백이에게도 겨울은 다른 계절에 비해 훨씬 힘듭니다. 북녘 땅에 적응된 풍산개라 다른 개들보다 추위를 덜 탄다고 하지만 영하 10°를 오르내리는 날씨엔 몸을 움츠릴 뿐이지요.
해가 구름 사이로 빠져나왔습니다. 며칠 전에 온 눈이 아직 녹지 않았지만 그래도 해가 나오면 살 만합니다. 해가 나오니 찬바람이야 불지만 나이 탓인지 슬며시 졸음이 몰려옵니다. 그때 무슨 소리가 들립니다. 아주 작은 소리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갉작갉작 소리가 납니다.
그냥 누운 채로 슬며시 몸을 돌립니다. 그런데… 까치 녀석입니다. 벌떡 일어났습니다. 다른 건 놔두겠으나 사료 훔쳐가는 것만은 참을 수 없습니다. 날아가는 녀석의 다리를 향해 이빨을 벌렸습니다. 그러나 겨우 꽁지깃 하나만 떨어뜨렸을 뿐.
‘괘씸한 놈!’
정말 괘씸한 놈들입니다. 집안에 들어와 훔쳐간 녀석 말고도 셋이 조금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만약 그냥 놔뒀더라면 네 마리나 되니까 제법 사료가 축났을 겁니다. 그리고 또 훔치러 오겠지요. 정말 괘씸한 놈들입니다. 이번이 처음 아니니까요.
며칠 전에도 갉작거리는 소리에 별일 아니겠지 하며 방심했다가 눈을 돌리니 세 마리가 망을 보고 한 녀석이 사료를 찍어 먹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 집에서 뛰쳐나오는 놈의 다리를 물려했으나 하도 재빨라 실패했습니다. 어차피 물어 상처를 입히기보다 겁을 주려는 목적이었으니 다시는 찾아오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잠이 깬 김에 마을 아래로 눈을 돌립니다. 오가는 사람 하나 없습니다. 다만 저 멀리 가음댁 할머니네 야옹이가 걸어가고 있습니다. 녀석도 심심한가 봅니다. 다시 스르르 눈이 감깁니다. 햇살이 잠들도록 만듭니다.
설핏 풋잠이 든가 싶은데 또 갉작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일어나려니 귀찮습니다. 사료야 좀 손해 보겠지만 잠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소리가 갉작거리는 정도가 아닙니다. 억지로 눈을 뜹니다. 세상에… 서너 마리쯤 왔겠지 했는데… 떼를 지어 와 있습니다. 늘밭마을, 찬새미마을, 밤골마을 까치까지 다 몰려온 듯….
벌떡 일어났습니다. 다 날아갑니다. 가장 늦게 가는 녀석의 다리를 물려했으나 또 깃털조차 건드리지 못합니다. 늙었다는 걸 이럴 때 느낍니다. 미칠 지경입니다. 눈 감으려 하면 오고, 잠들 만하면 오니 낮잠을 편히 잘 수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까치가 사료를 탐낸 건 눈이 오고 난 다음인 듯싶습니다. ‘눈이 오고 난 다음에….’ 하다가 산으로 눈을 돌립니다. 뒷산은 잡목보다 소나무가 많은 산인데, 그럼 녹색 세상이 되어야 함에도 녹색보다 흰빛이 훨씬 더 많습니다. 눈이 아직 녹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날입니다. 어제 혼을 낸 덕분인지 까치 녀석들만 저만치 떨어져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습니다. 잠이라도 들면 또 훔치러 올 눈치가 분명합니다. 오늘은 절대로 절대로 틈을 주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졸음을 쫓으려 애썼는지 모릅니다.
문득 하늘을 봅니다. 해가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습니다. 구름이 끼어서 졸음이 오지 않는 건 다행이나 햇살이 없으니 몸이 으스스합니다. 낮잠 자지 않고 버티는 것과 추위를 견디기 힘든 것 둘 다 늙은 탓인 듯싶습니다. 하늘을 보아하니 또 눈이 오려는가 잿빛입니다.
하루가 더 지났습니다. 간밤에 눈이 얼마나 왔는지 온통 하양 세상입니다. 산에 우뚝 솟은 큰 소나무 윗부분의 녹색만 제외하고는 오직 한 가지 색입니다. 들판은 아예 한 가집니다. 집도 하얗습니다.
된장댁 할머니네 장독대도 하얗습니다. 타작마당 앞에 가득 쌓아 썩혀 둔 누런 두엄도 하얗습니다. 개울가에 도시 사람 누군가 몰래 버리고 간 검은색 텔레비전도 하얗습니다. 하얀색 아닌 걸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말 그대로 '하양 천지'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봅니다. 구름이 살짝 벗겨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전 중으로 햇빛을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해가 나온들 눈이 다 녹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해가 있는 게 훨씬 더 낫습니다. 구름에서 시선을 아래로 두는데 뽕나무 위에 까치집이 보입니다. 녀석들은 아직 나들이 전일 겁니다. 전깃줄에도 눈이 와 있으니까요.
그런데 눈… 또 눈이 내렸습니다. 까치에게 가장 해로운 눈입니다. 눈으로 덮이면 돌아다녀본들 먹을 걸 하나도 구할 수 없으니까요. 눈이 다 덮었으니까요. 까치들은 겨울엔 차라리 겨울잠을 자는 개구리가 더 부러울지 모르겠습니다.
오후가 되자 예상보다 기온이 올라가선지 양지쪽에 눈이 조금씩 녹습니다. 태백이의 집 앞에도 눈이 제법 녹았습니다. 덕분에 발로 몇 번 설설 긁자 눈이 벗겨지면서 맨땅이 드러납니다. 비록 물기야 있지만 그래도 개집 안보다는 땅에 눕는 게 더 편합니다.
오가는 사람도 야옹이도 없고 바람조차 없으니 절로 잠이 옵니다. 슬며시 몸을 눕힙니다. 햇살이 나와 딱 잠들기 좋습니다. 그런데 또… 갉작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몸을 돌립니다. 한 마리가 집에 들어가 사료를 먹다가 뛰쳐나오는 게 보입니다.
‘저게…’ 하다가 뒷산을 봅니다. 산에는 아직도 온통 하양 세상입니다, 아주 높이 솟은 소나무를 빼고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까치 녀석들이 떼 지어 이쪽 눈치를 살피고 있습니다.
두 발을 땅에 굳게 딛고 서 있으면 녀석들이 절대로 이곳으로 오지 못하겠지 하다가… 이번에는 오히려 오지 않는 잠을 자러 일부러 눕습니다. 뒤에서 갉작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마도 전처럼 몇 놈이 망을 보고 한 녀석이 집에 들어가 있겠지요.
그런데 집에… 사료통이 개집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집 안은 좁아 잘해야 둘셋 정도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잘해야 두어 녀석만 먹을 수 있을 테고… 갉작거리는 소리는 여전히 들려오지만 일부러 계속 누워 자는 척합니다.
헌데 소리가 점점 요란해집니다. 고개를 돌립니다. 부리나케 집에서 뛰쳐나오는 녀석이 보입니다. 그리고 주변에서 물러나는 녀석들도. 세상에! 참 많이 몰려와 있습니다. 이 마을에 사는 까치란 까치는 다 몰려온 듯합니다.
아니 어쩌면 먼 마을 까치들도 몰려왔는지 모릅니다. 그 가운데 사료 몇 점의 혜택을 받은 녀석들은 극히 일부일 겁니다. 그러니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빙 둘러서 있는 거지요. 한 번만 크게 짖으면 다 날아가 버릴 테지만.
태백이는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돌아보지 않아도 잘 압니다. 까치들은 이제 끝났다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겠지요. 태백이가 이빨로 사료통을 세게 물었습니다. 무게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도 애써 밖으로 물고 나왔습니다.
까치 몇 마리가 날아가려다가 멀뚱히 바라봅니다. 태백이가… 앞발로 사료통을 힘차게 찼습니다. 사료통이 튕겨나가며 사료가 엎질러집니다. 사료 알갱이가 분분히 흩어집니다. 아래로 난 경사를 타고 마구마구 흩어집니다. 봄날 잘 익은 민들레 홀씨가 사방으로 흩어지듯이,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댓돌에 닿으면 사방으로 튕기듯이...
날아가던 까치들이 도로 날아옵니다. 그리고 허급지급 사료를 쪼아댑니다. 하얀 눈 위를 까만 날개의 까치들이 순식간에 덮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끝났습니다. 거의 한 통 가득 쏟았지만 워낙 많은 까치들이니까요. 배부름은 고사하고 고작 허기나 면했을까요?
다음날 아침, 주인아저씨가 사료를 살피러 나왔다가 태백이의 이마를 한 대 쥐어박습니다. 사료통이 바깥에 나와 뒹굴고 있기 때문이지요. 사료를 채우고 난 뒤 이내 자리를 뜨자마자 태백이는 자기 먹을 걸 줄인 뒤 다시 사료통을 앞발로 찹니다. 그리고 까치가 떼 지어 날아옵니다.
그다음 날 아침에는 태백이가 주인에게 두 대나 쥐어 박힙니다. 그래도 자기가 조금 먹고 또 사료통을 찹니다. 며칠 동안 계속되자 주인아저씨가 대가리를 쥐어박으면서 욕까지 내뱉습니다.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건만 태백이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요.
그래도 태백이는 눈이 녹을 때까지 그 일을 계속합니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달내마을의 그 해 겨울은 참으로 따뜻했습니다.
*. 우리 집 태백이가 한 행동이 이 글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하는지는 자신 없습니다만 제가 본 것에 상상을 덧붙였습니다.
*. 마지막 그림은 아는 이가 그려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