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432)

제432편 : 장옥관 시인의 '추상화 보는 법'

@. 오늘은 장옥관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추상화 보는 법
장옥관

한사코 보는 것만 보려 한다
수석 취미 가진 사람은 알리라 강바닥에서 주워온 돌에 박혀 있는 온갖 무늬
우리는
한사코 무언가를 떠올리려 한다
누가 말릴 것인가 국화빵에서 국화를 피우려는 그 집요함을,
신기한 것은
제목 붙이고 설명 곁들이고 난 뒤에는
누구든 이의를 달지 않는다는 사실
아무리 어르고 쥐어박아도 다르게 볼 수 없다는 사실
뭐든 보려면 제대로 봐야 한다는데
디자인이 좋아 사 온 로가디스 기성양복
굵은 몸통 기어코 끼워 넣으려는 나의 정신은,
살색 의수(義手)에 끼워놓은 꽃반지 같다
- [달과 뱀의 짧은 이야기](2023년)

#. 장옥관 시인(1955년생) : 경북 선산 출신으로 1987년 [세계의문학] 통해 등단. 중학교 교사, 기업체 홍보과 근무를 거쳐, 계명대 문창과 교수로 근무하다 퇴직.




<함께 나누기>

가끔, 아주 가끔 그림 전시회에 들릅니다. 동양화나 한눈에 딱 봐도 뭘 그렸는지 알 수 있는 그림일 때는 그 앞에 시간을 좀 둡니다. 허나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림, 즉 추상화 앞에 서면 머리가 아파집니다. 도대체 뭘 그렸는지 알고 싶으나 알 수 없으니까요.
마침 곁에 그린 화가가 계시면 물어보는데, 그분이 아주 상세히 설명해 주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해설 새기며 다시 한번 더 봅니다. 그나마 이런 말이라도 해주는 화가 계시다면 다행이지만 ‘그냥 느낀 대로 보고 가세요.’ 하면 정말 짜증 납니다.

사실 제가 시 해설할 때도 이런 말을 자주 덧붙입니다. ‘시 읽고 자기에게 다가온 소리대로 음미하세요.’ 시에 익숙하지 않은 분은 황당하실지도... 처음 시를 읽었을 때는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가 제가 해놓은 해설을 보니 이해가 되더라는 말이 한편 고맙고 한편 두렵습니다.
왜냐면 읽는 이는 다른 해석을 하려 하지 않고 제 해설에 붙잡혀 그게 제대로 된 풀이인 양 느낄까 두려워. 추상화를 보고 저 같은 문외한이 물었을 때 화가가 친절하게 무엇을 생각하고 그렸다 하면 관람객은 그 그림에서 다른 면을 찾는 대신 그에 맞춰 생각합니다.

오늘 시는 바로 그런 점을 지적하고 있지 않나 합니다. 여러 갈래로 볼 수 있는 길을 단 하나의 길로만 가게 만드는 작품 보는 시각의 편협성에 대해.

“한사코 보는 것만 보려 한다”

수석에 취미 가진 이가 강바닥에서 돌을 주웠는데 거기 무늬가 박혀 있다면 그것에 맞는 이름을 붙이려 합니다. 사실 돌이 창조될 때는 돌 스스로 이런 문양이었으면 하고 바랐을까요? 아니면 조물주가 '너는 토끼와 거북이란 이름의 돌이 되어라'라고 명했을까요?

“누가 말릴 것인가 국화빵에서 국화를 피우려는 그 집요함을”

국화빵에 국화가 없고 붕어빵에 붕어 살코기가 단 한 점도 들어가지 않았건만 우린 거기서 한사코 뭔가를 떠올리려 합니다. 떠올려본들 빵 모양이 국화와 붕어랑 비슷하다는 점 외는 아무 관련 없건만. 단지 있다면 팥이 들었느냐 슈크림이 들었느냐의 차이일 뿐.
혹 붕어빵과 비슷한 잉어빵을 두고 차이를 따져보려는 사람은 없겠지요. 붕어빵의 빵틀만 살짝 바꿔 새로운 이름을 붙였을 뿐인데.

“신기한 것은 / 제목 붙이고 설명 곁들이고 난 뒤에는 / 누구든 이의를 달지 않는다는 사실”

제 동기 가운데 제법 알려진 시인이 있는데 (너무 어려워 초기엔 몇 편 배달하다가 지금은 하지 않음) 그랑 얘기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시 해설을 하고 있다고 하자 이런 말을 하더군요.
“그런 해설은 상당히 위험하네. 정선생이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사람들은 다른 관점을 버리고 그렇게 해 놓은 그걸 정의로 여길 텐데...”

“아무리 어르고 쥐어박아도 다르게 볼 수 없다는 사실 / 뭐든 보려면 제대로 봐야 한다는데”

추상은 현실의 구체적 형태를 닮지 않고, 형상의 본질이나 작가의 주관적 감정 등을 표현하는 예술 방식인데, 구체화를 피하려 만들어진 새로운 예술 형태인 추상을 누군가 먼저 ‘이렇다’ 하고 정의 내리면 그게 정설로 굳어지니까 그런 점을 피하라는 뜻으로 새깁니다.

“디자인이 좋아 사 온 로가디스 기성양복 / 굵은 몸통 기어코 끼워 넣으려는 나의 정신은 / 살색 의수(義手)에 끼워놓은 꽃반지 같다”

‘디자인이 좋아 사 온 로가디스 기성양복’은 개성 없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유행만 좇는 풍토를 뜻하는데, 나와 맞지 않음에도 억지로 거기 끼워 넣는 세태를 비판하는 내용 같습니다. 살색 의수에 꽃반지가 전혀 어울리지 않듯이.


누군가는 예술의 본질이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함'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익숙한 걸 가까이하고 낯선 걸 기피합니다. 아마도 앞으로 갈수록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순수함에서 때 묻음으로, 낯섦 아닌 익숙함으로 변할 게 뻔한데 추상 예술의 앞길은 어떻게 될지.

*. 자료 그림은 프랑스 화가 '장 뒤뷔페'의 ‘Metaphysics’(1950)란 추상화입니다. 무엇을 그렸는지는 각자 알아서 생각해 보시길. 저는 처음엔 나뭇가지와 뿌리인가 했는데, 여성의 신체를 의도적으로 흉물스럽고 기괴하게 묘사함으로써 전통적인 미의 기준을 뛰어넘은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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