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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434)

제434편 : 송유미 시인의 '슬픔을 주유하고 싶다'

@. 오늘은 송유미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슬픔을 주유하고 싶다

송유미


차를 몰다가 엔진이 꺼져버리면 어떡하죠

알맞게 슬픔은 마이너스된 세상 슬픔을 주유하는 곳이 있다면

슬픔을 한 트렁크 담아오고 싶어요

언제였던가요 영안실 빈소 앞에서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던

사막의 마음, 그 비정함 때문에 간간이 고지대 수돗물처럼

흘러나오던 참으로 비참하던 기억


울고 싶으면 울어야 인간적이죠 그러나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죠

굳세고 단단한 무쇠여야 살아남을 수 있죠

살아남기 위해 단단히 열쇠를 채워두었던 슬픔의 창고

그 창고를 열고 싶어요

슬픔은 나약한 자의 것, 우울은 가난한 자의 것,

오감이 폐기처분된 세상은 플라스틱 가구처럼 깨끗하죠


깨어지지도 부서지지도 않는 플라스틱 세상 속에

전 마네킹이 되어가죠


아 그리운 슬픔, 아 그리운 그리움

말라버린 나무를 보며 난 생각하죠

슬픔은 얼마나 아름다운 생수인가를

슬픔을 주유하고 싶어요

입안 가득 슬픔의 잎새를 물고 필리리 필리리…

푸르르게 슬퍼지고 싶어요

- [파가니니와의 대화](1994년)


#. 송유미 시인(1955 ~ 2023년) : 서울 출신으로 1989년 [심상](시), 1993년 부산일보(시조), 1997년 [동아일보](시조), [경향신문](시)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남들은 한 번도 등단하기 힘든 과정을 네 번이나 합격해 문재(文才)의 뛰어남을 인정받았는데, 안타깝게도 좋은 시를 더 쓸 나이에 세상을 떠남.




<함께 나누기>


시를 읽도록 끌어당기는 제목의 작품을 몇 편 봤는데, 오늘 시도 그 가운데 한 편입니다. 보통 ‘주유’라는 말은 주유소에서 기름 넣을 때나 쓰는데 여기선 슬픔을 주유한다고 했으니. 이 시 배운 뒤론 슬픔 대신 '기쁨, 행복, 희망'을 주유한다는 말을 써도 될 듯.

어릴 때 남자들은 ‘사내는 절대로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지요. 눈물 잘 흘리는 애는 '가시나'라 해 따돌림받았고. 이렇게 강제로 감정을 억누르는 교육을 받아선지 정말 울어야 할 경우에도 그러지 못할 때가 잦습니다.


“알맞게 슬픔은 마이너스된 세상 슬픔을 주유하는 곳이 있다면 / 슬픔을 한 트렁크 담아오고 싶어요”


현대는 슬픔이 마이너스(말라붙은) 된 세상입니다. 그러니 슬픔이 부족해 슬픔을 주유하는 곳을 찾아가야 하는 시대입니다. 슬픔을 주유할 곳, 거기는 어딜까요? ‘주애(注哀)소’ 혹은 ‘주루(注淚)소’? 이름이 뭐라든 어디 있기는 할까요?


“언제였던가요 영안실 빈소 앞에서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던”


부모나 형제처럼 가까운 이가 하늘로 갔다면 빈소 찾아와 눈물 흘려야 마땅하건만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면. 나오더라도 고지대 수돗물처럼 아주 가늘게 흘러나온다면. 그 자리가 꽤나 불편할 겁니다. 눈물 펑펑 흘려야 할 곳에선 그래야 하건만.


“울고 싶으면 울어야 인간적이죠 그러나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죠”


울고 싶으면 울어야 인간적입니다 그럼에도 우린 억제해야 했고 참아야 했습니다. 헌데 왜 울 수 없었을까요. 저는 사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눈물이 나오지 않아 혼이 났습니다. 사람들이 다들 보고 있는데 눈물 나지 않으니 그냥 곡 소리로 때울 뿐.

그러다 일주일 뒤 부산 집에 내려와 무심코 아버지 계시던 방문을 열었을 때 아무도 계시지 않음을 알고 부엌 바닥에 퍼질고 앉아 펑펑 울었지요. '존재와 무'에 이르는 깨달음일까요? 지금도 왜 초상 치르는 사흘과 삼우제로 이어진 그날까지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슬픔은 나약한 자의 것, 우울은 가난한 자의 것 / 오감이 폐기처분된 세상은 플라스틱 가구처럼 깨끗하죠”


슬픔은 강한 자에겐 어울리지 않고 약한 자의 전유물이랍니다. 우울 역시 마찬가집니다. 부유한 자는 우울하지 않고 가난한 자만 우울하니까요. 세상은 우리에게 오감이 없어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기뻐도 슬퍼도 아파도 괴로워도 드러내기보다는 감추라는 뜻으로.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은 우울증은 가난한 사람만 걸리고 부유한 사람은 걸리지 않는지, 강한 자는 남이 보지 않을 때도 울지 않는지...


“깨어지지도 부서지지도 않는 플라스틱 세상 속에 / 전 마네킹이 되어가죠”


플라스틱 가운데 폴리카보네이트는 단단하여 쉽게 변형되거나 분해되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우리네 세상이 그것과 닮았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 살다 보니 개성을 잃은 채 마네킹처럼 획일화되어 가며, 비인간적인 상태로 살아가야 합니다.


“슬픔은 얼마나 아름다운 생수인가를 / 슬픔을 주유하고 싶어요”


슬픔은 피해야 할 게 아니라 청신한 생수처럼 들이마셔야 합니다. 문득 내 가슴에 억지로 묵혀 두었던 슬픔이 한 번씩 소용돌이칠 때를 대비해. 우리는 대체로 감정을 다스리거나 위로받는 방법을 몰라 어쩔 줄 모르고 우물거리며 당황하는 편이라 슬픔을 드러냄에 참 인색합니다.

아, 슬픔을 주유할 수만 있다면, 적은 양 말고 가득 채울 수만 있다면, 텅 빈 눈물샘이 마르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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