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지럼나무를 아십니까?

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62)

* 간지럼나무를 아십니까? *



나무 가운데 재미난 현상을 보이는 나무로 '달내마을 이야기' 제59편에서 "자귀나무"를 소개한 바 있다. 자귀나무는 잎사귀가 낮엔 펴져 있다가 밤이 되면 오그라든다 하여 부부의 금실을 상징하는 나무, 그래서 ‘사랑나무’라 소개했다.

자귀나무는 밤이 되면 오그라들지만 만진다고 하여 변화하진 않는다. 만지면 변화하는 풀로 ‘미모사(mimosa)’가 있다. 미모사는 달리 ‘신경초’라고도 하는데, 밤이든 낮이든 만지기만 하면 둘로 펼쳐진 잎이 달라붙는다. 그 붙은 모양은 자귀나무 잎사귀와 비슷하다.


그런데 자귀나무처럼 밤에만 달라붙거나, 미모사처럼 낮이든 밤이든 만지면 달라붙는 풀과 달리 간지럽히면 움직이는 나무가 있다. 바로 간지럼나무라 불리는 백일홍이다. 아니 백일홍은 공식 명칭이 아니니 '배롱나무' 또는 '나무백일홍'이라 하자.




다음에 혹 배롱나무를 보면 잠시 실험을 해보길 바란다. 실험은 아주 간단하다. 나무껍질을 손으로 간질여 보면(긁으면) 꽃잎이 움직인다. 혹시 바람 때문에 움직인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한다면 이번엔 바람이 불지 않을 때를 틈타 간질여 보라. 역시 움직인다.

그런데 이 간지럼도 그냥 손으로 슬슬 비비는 것보다 새털 같은 걸로 나무껍질(또는 가지)을 간질이면 더 심하게 움직인다. 그리고 간질임이 심할수록 그 정도가 뚜렷한데, 꽃잎이 움쭉움쭉 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사람을 간질였을 때 나타나는 반응과 다름없다.


간지럼나무, 배롱나무는 원래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나무가 아니라 죽은 이들을 위한 나무였다. 그래서 무덤이나 제단(祭壇) 주변에 심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지만 꽃말이나 전설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백일홍의 꽃말은 ‘떠나간(또는 죽은) 님에 대한 그리움’이다. (* 꽃말 가운데 ‘부귀, 꿈, 행복’도 있음)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의 육신은 없어지지만 그에 대한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안타까움 때문에 백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




전설은 더욱 슬프다.


옛날 한 어촌마을 근처 바다에 수시로 사람을 해치는 이무기 한 쌍이 살았다고 한다. 행패를 부리는 이무기를 달래기 위해 해마다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했는데, 한 장사가 나서 이무기 암컷을 해치고 처녀를 구해준다.

이후 둘은 사랑하게 되고, 장래를 약속한 상태에서 장사는 죽은 이무기의 수컷을 마저 해치우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때 장사는 자기가 성공하면 흰 돛을, 실패하면 붉은 돛을 달고 오겠다고 약속한 뒤, 돌아오면 결혼식 올리기로 하고 떠난다.


백일을 기도하며 기다리던 처녀는 절벽 위에서 장사를 기다렸는데, 저 멀리 수평선에 붉은 돛이 보이자 절망하여 뛰어내려 죽고 말았다. 이무기의 피가 튀어 돛이 붉게 물든 줄 몰랐던 장사는 그 때문에 처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안 뒤 크게 슬퍼하였다.

그 후 처녀의 무덤에서는 붉은 꽃이 백일 동안 피었다 한다. 그래선지 무덤가에 핀 백일홍은 아름답기보다 처연(凄然)하다. 자세히 보면 붉은빛이 교태롭다기보다 귀기(鬼氣)가 어려 있음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매끈하게 빠진 나뭇가지조차 고운 몸매보다는 애잔한 아픔을 자아내고...




백일홍은 언뜻 생각하면 한 꽃이 백일 동안 피어 있기에 얻은 이름 같지만 그게 아니다. 한 꽃이 지면 다시 다른 꽃이 이어 피기에 보는 이의 눈에는 늘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우리네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한 개인으로 보면 꽃의 지고 핌이 행불행의 교차와 같고, 한 사회나 국가로 보면 수많은 사건 사고의 부침 속에서도 말없이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또 배롱나무는 선비의 올곧은 심성을 상징한다. 즉 배롱나무가 핀 명소를 찾아보면 ‘서원’ 이름 붙은 곳이 많다. 배롱나무는 시간이 지나면 껍질이 벗겨진다. 벗겨진 그 속살은 참 희다. 까도까도 하얀 속살, 바로 겉과 속이 순백한 선비의 심성을 닮아서일까.

배롱나무 피는 명소로 나는 단연코 ‘병산서원’을 꼽는다. 해마다 여름에 찾아갔는데 올해는 가지 못했으니 다음 주쯤 찾아가 볼 예정이다. 400년에 이른 배롱나무가 7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새빨간 꽃을 피우니 그 사이엔 언제든 볼 수 있다.




병산서원을 찾아가야 할 이유는 배롱나무 말고도 더 있다. 뒤로는 화산이 든든하게 받쳐주고,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른다. 그리고 낙동강 건너 병풍 모양의 절벽산(병산)이 웅장하게 펼쳐진 광경은 참으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아득히 넓고 길게 펼쳐진 백사장. 아시다시피 강가 백사장 모래는 바닷가 모래와는 전혀 다르다. 바닷가 모래는 밟으면 찝찔한 느낌을 주나 강가는 깔끔함에 이어 '뽀드득!' 하며 나는 소리가 듣기 좋다.


세월이 지나면서 배롱나무도 죽은 이들을 위한 꽃에서 산 사람들을 위한 꽃으로 바뀌었다. 전원주택을 지으면 관상수로 우선 심는다. 일단 수형이 좋으니까 심으면 예쁘다. 그리고 가로수로 각광을 받아 새로 조성하는 도로엔 배롱나무가 주종을 이룬다.


이 글 읽는 분들은 꼭 병산서원이 아니더라도 배롱나무, 아니 ‘간지럼나무’ 만나는 짬을 가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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