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초 혹은 상사화

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63)

* 상사초 혹은 상사화 *



이즈음의 우리 집 꽃밭을 화사하게 꾸미는 꽃이 둘 있다. 하나는 백일홍(배롱나무)이요, 다른 하나는 상사화다.


35년 전쯤 처음 상사화를 마주했을 때 일이 생각난다. 그때 문무대왕면(양북면)에 주말주택을 얻어 정말 주말주택이란 말에 걸맞게 토요일마다 거기 들렀다. 먹거리로 ‘상추, 들깨, 토마토, 가지, 오이’, 볼거리로 ‘채송화, 분꽃, 해바라기, 봉선화’, 먹거리와 볼거리 겸용으로 ‘구기자, 배나무, 청매, 앵두’도 심어놓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들를 때마다 쑥쑥 커가는 모습이 얼마나 이쁘던지, 그냥 먹지 않아도 기분 좋았다. 그랬으리라. 지금처럼 상주하지 않으니 자라는 모습에 대한 느낌이 확실히 달랐다. 다음에는 얼마나 자랐을까 하는 기대감을 잔뜩 품게 했으니.




이듬해 봄, 한 구석에서 ‘군자란’ 비슷한 잎이 솟아났다. 별생각 없이 이 집의 전 주인이 심어놓은 화초로 여겼는데… 한 달 뒤쯤 보니 그 자리에 잎이 없어지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누가 몰래 뽑아갔다고 속으로 욕을 해댔다. 그땐 그 꽃의 생태를 몰랐으니까.

헌데 다시 보름 뒤쯤 갔더니 그 자리에 민둥꽃대가 쑥 올라오고, 다음 주에 갔더니 꽃이 피어 있는 게 아닌가. 잎은 하나도 없이 오직 민둥꽃대에 꽃 한 송이만 매달린 채. 지금이야 상사화라는 걸 알지만 그때는 몰랐으니까 얼마나 신비로웠는지.



봄에 아무것도 없던 땅에서 잎이 쑥 솟아났다가, 여름에 잎이 사라지면 꽃대가 올라오고, 잎이 없는 꽃대에 꽃 한 송이 달랑 맺혔다가, 가을이 되면 꽃대와 꽃이 사라지고, 다음 해 봄이 되어야 다시 잎이 솟아나는.

(그래서 편의상 잎이 있을 때를 '상사초'라 하고, 꽃이 필 때는 '상사화'부름)


(상사초일 때 모습)



상사화는 반드시 잎이 지고 난 뒤 꽃이 핀다. 그리고 꽃이 필 때는 잎은 없고 달랑 꽃대 하나만 솟는다. 그러므로 잎과 꽃은 서로 만날 수 없다. 잎은 꽃을 그리워하지만 꽃이 피기 전에 사라져야 하고, 꽃도 잎을 보고자 하나 잎이 피기 전에 떨어져야 하니까.

그래서 둘은 무한정 애틋하게 그리워만 하다가 서로 보지 못하고 끝나버리기에 누가 이름을 붙였는지 ‘상사화(相思花)’란 이름이 딱 어울린다. 이러니 상사화에 전설이 없을 수 없다. 다만 그 전설이 마음에 안 들어 내 입맛대로 바꾼다.


“옛날 경상도 어느 절에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된 아이를 주지 스님이 데려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주지 스님과 ‘능공’이란 법명의 동자승 단 둘이 살았는데 어느 해 공양주 보살(스님들의 음식을 담당하는 여자)이 ‘정화’란 어린 딸을 데리고 들어왔고...


어릴 때는 소꿉친구로 혹은 남매처럼 지내다가 시간이 가면서 나이 먹어 총각 처녀가 되었습니다. 좁은 절에서 함께 자란 피 끓는 두 젊은 남녀. 둘의 눈동자에 어린 사랑의 열기를 본 주지 스님과 공양주 보살은 둘 사이를 떼어내려 했고.

급기야 공양주 보살이 정화랑 떠난 뒤 주지 스님은 능공에게 강제로 면벽수행을 명했으나 이미 그의 마음엔 정화만 가득할 뿐 부처님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절을 뛰쳐나온 능공은 정화를 찾아 나섰으나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어 3년을 헛되이 돌아다니다 찾았을 때는 이미 남의 여인. 절로 돌아온 능공은 그날로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고, 그러다 결국 세상을 떠납니다.

이듬해 봄 능공의 무덤 위에 연분홍 꽃 한 송이가 피었는데, 세속 여인을 향한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이 모여 핀 꽃이라 하여 상사화라 이름 붙었습니다.”




이런(또는 이와 비슷한) 전설 때문인지 상사화는 절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다. 물론 심어 놓은 까닭이 남녀의 사랑과 관계있다기보단 보고 싶은 부모형제와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스님들의 사정과 닮아 있기 때문이겠지만.

상사화 얘기는 꼭 스님과 부모형제 사이로만 국한된 얘기는 아닐 게다. 둘러보면 그에 어울릴 만한 사람들이 꽤 되리라. 우선 생각나기로는 이산가족, 그들은 남과 북에 떨어져 만나보고 싶어도 보지 못한다.


또 드라마 속의 비련의 남녀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헤어진 경우. 다시 만났을 땐 한 사람의 아내나 남편이 되어 있다면 만날 수 없다. 아니 만나선 안 된다. 이런 류의 에피소드는 요즘 드라마의 단골 메뉴가 아닌가.


결국 상사화 혹은 상사초는 ‘만남’과 관련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만나야 하나 만날 수 없는, 만나선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하여 밤마다 상사(相思)로 베갯잇을 적셔야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 정말 있다면 얼마나 괴로울까.




조금의 위안이나마 되도록 다른 방향에서 한 번 살펴보자.

잎의 모양인 상사초로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의 모양인 상사화로 있을 때는 잎이 없다. 허나 상사초로 있어도 뿌리가 있고, 상사화로 있어도 뿌리가 있고, 둘 다 없는 겨울에도 뿌리는 땅속에서 살아 있다. 그러니 꽃과 잎은 직접 만나지 못할지라도 뿌리를 통하여 서로 만나고 있는 셈이다.


스님과 부모형제, 남북 이산가족, 만날 수 없는 비련의 남녀들… 이들은 앞을 가로막는 벽으로 만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비록 벽이 그들을 가로막지만 가로막을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콘크리트벽이든, 쇠로 된 벽이든, 유리벽이든 뚫고 들어간다. 그리하여 둘을 맺어준다. 바로 이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드러나는 것만을 결실로 여기는 데서 우리의 허무는 더해진다는 것을. 진실로 알찬 열매는 시나브로 우리 몸속에 배어든다는 것을. 우리의 그리움이 사라지지 않는 한 둘은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상사화 구근)



이제 보름쯤 지나면 우리 밭에 상사화는 사라질 테고, 그러면 상사초와 상사화가 자라던 그곳에는 흙만 남을 게다. 허나 꽃으로 있든 잎으로 있든 그들은 뿌리를 통하여 정담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하여 내년 봄 다시 잎으로 있든, 꽃으로 있든 둘은 만날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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