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전설 새로 만들기

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81)

* 나팔꽃 전설 *



한가위에 서울 사는 딸네 가족이 왔습니다.
아침에 손녀 둘과 마을 한 바퀴 도는데 길가에 핀 남자주색 꽃을 보았습니다. 유치원 다니는 작은손녀가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저기 나팔꽃이 피어 있네요.”

재작년 가르쳐준 꽃 이름 잊지 않음이 얼마나 대견한지. 그래서 나팔꽃 꽃말과 꽃에 얽힌 전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전설을 듣던 큰손녀가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 시시하다. 재미없어요.”

전해오는 나팔꽃 전설은 제가 들어도 별 재미없었습니다. 덕분(?)에 숙제 하나를 받았습니다. 손녀에게 재미있는 전설 만들어 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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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나라 국경마을에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동네 뒷산에 올라가 사냥하다 짬나면 이웃에 허드렛일도 해주며 살아가는 소년이 살았습니다. 소년은 비록 의지할 데 없고 몹시 가난했지만 늘 웃음을 잃지 않고 웃는 얼굴로 살아 마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이 소년에게 남다른 장점이 둘 있으니, 눈이 아주 밝아 멀리까지 볼 수 있고, 풀피리든 나무피리든 손에 쥐면 잘 부는 능력입니다. 사냥을 하다 보니 눈이 좋아졌고, 또 홀로 사는 외로움을 이겨내려 뒷산에 올라가 피리를 불었으니 그런 능력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그날도 야트막한 동산에 올라가 풀피리 불고 있는데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세상에! 거기엔 천사 같은 소녀가 서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소녀는 이웃나라 성주의 딸인데 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들이 왔다 길을 잃고 헤매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리소리에 이끌려 따라온 것입니다.

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소년의 마음에는 환히 등불이 피어났습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소녀를 자기 사는 성에서는 본 적 없으니까요. 소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처럼 순박한 눈동자를 지닌 소년을 본 적 없었습니다. 둘은 말 그대로 첫눈에 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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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남 이후로 하루는 소년이 저쪽 성으로 넘어가고, 또 하루는 성주 딸이 이쪽 성으로 넘어와 소년이 피리 불면 소녀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때는 두 나라 사이가 나쁘지 않은 때였으니 비록 국경이 있다 해도 오고 감에 큰 장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두 나라 사이가 갑자기 나빠짐에 따라 국경 드나듦이 막혀 서로 원수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두 나라 사이가 그렇게 되니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두 성 사람들도 오고 갈 수 없어 둘의 만남은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이쪽 성에는 군사가 부족하여 소년은 비록 나이 어렸지만 피리 부는 재주와 멀리까지 내다보는 능력 덕에 성을 지키는 파수병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난감했습니다. 허나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좋다고 여겼습니다. 소녀를 만날 수 없지만 피리로 저쪽까지 마음을 담아 보낼 수 있으니까요.

소녀도 소년 만나러 갈 순 없었지만 어렴풋이 들리는 피리소리 듣자마자 단번에 소년이 파수병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좋았습니다. 짬을 내 멀리서나마 소년을 보고 피리소리를 들으려 성안을 몰래 빠져나가 성벽 아래까지 오면 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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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가끔씩 소녀가 몰래 빠져나가는 걸 알아챈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오빠였습니다. 평소 얌전하던 누이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바람에 몰래 뒤따르다 성벽 아래 이르니 성 위에서 은은히 피리소리 들려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성주 아들은 단번에 누이와 파수병 소년 사이에 오가는 미묘함을 눈치챘습니다. 오빠에게는, 아니 그 성의 성주에게는 소년이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몰래 침범해 정보를 캐러 잠입하려 할 때마다 눈이 밝은 소년에게 들켜 피리소리로 경고를 보내는 바람에 실패를 하곤 했으니까요.


오빠는 성주인 아버지께 일러바칠까 하다가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바로 누이동생을 이용하려는 꾀가. 파수병을 처치하면 공격하기 쉬운데 늘 성벽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살짝 얼굴 일부만 내밀었으니 아무리 활을 잘 쏜다고 해도 맞출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파수병이 온몸을 드러낼 수 있다면 맞힐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일을 누이가 모르는 상태에서 해 주길 바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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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누이가 성을 빠져나가자마자 군사를 이끌고 몰래 따랐습니다. 그리고 소녀가 성벽 아래 이르니 역시 피리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제 기회가 왔습니다. 파수병이 몸을 드러내기만 하면 됩니다. 자기가 활을 쏴 성벽에 떨어지면 군사들이 몰래 들어가는 작전입니다.
오직 소년 파수병의 피리소리에 빠져 있는 성벽 아래의 누이에게 군사 한 명을 보내 해치려는 시늉을 하도록 했습니다. 누이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태에 놀라 비명을 질렀고 그 비명에 놀란 소년이 아래를 내려다보려고 몸을 드러냈습니다. 순간 성주 아들은 활을 쏘아 소년을 맞추었습니다.

소녀는 자기에게 일어난 사태에 채 정신을 추스르기 전에 연달아 일어난 사태에 얼이 나갔습니다. 그래도 무의식 중에 떨어지는 소년을 보면서 무작정 그를 향해 뛰었습니다. 소녀가 뛰어가 안았을 때는 이미 피범벅이 된 몸이었고...

꿈에도 생각 못하던 비극에 정신을 못 차린 상황이었으나 숨어드는 군사와 오빠를 보자마자 소녀는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차렸습니다.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도 소녀는 소년이 쥐고 있던 피리를 빼내 힘차게 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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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소리가 울려 퍼지며 성벽에 사람들이 나타났고 상황을 알아차린 그 성의 병사들이 아래로 화살을 날렸습니다. 몰래 쳐들어가려던 성주의 아들은 자기 누이 때문에 실패하자 화가 난 눈으로 찾았습니다. 허나 그때는 소녀 역시 목숨을 끊은 뒤였고...
자기로 하여 죽은 소년을 잊지 못해 이승에서 꽃 피우지 못한 사랑을 내세에서나마 이루고자 한 소녀 뜻을 하늘이 갸륵하게 여겼을까요. 다음 해 봄이 가고 여름이 되자 성벽 아래엔 나팔 모양의 빨간 꽃과 남자주색 꽃 두 송이가 마주 보며 나란히 피어났습니다.

그 뒤 둘의 서슬 퍼런 한이 맺혀 남자주색 꽃으로, 둘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담겨 빨간 꽃으로 피어났다고 하는 얘기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답니다.”


*. 오늘 글은 예전에 올렸는데, 내용을 보강하여 다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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