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한 소통(464)

제464편 : 김연성 시인의 '벼랑에 서다'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김연성 시인 편 ♡


- 벼랑에 서다 -


혼자였다 눈물은 오래 참다 뚝 떨어지는 순간, 저 바닥까지는 천길 벼랑과 같다 아무도 푸른 수심을 알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움켜잡았지만 어떤 번호도 떠오르지 않았다 숫자로 호명할 수 없는 많은 얼굴들이 스쳐갔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다만 두 주먹을 불끈 쥐었을 뿐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을 뿐이다 바람 한 점 없는 거리는 적막하였지만 어두워지는 도시를 내다보면서 그는 괜찮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함부로 등짝을 보이지 않으려고 동료들에게 말을 걸었을 뿐이다 이제 이 더러운 세상과는 당분간 무관심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하루를 어떻게 외면했는지 모른다 시간이 씨발時가 되자 연기처럼 사무실을 빠져나와 짧은 사거리를 빠르게 흘러갔다 지하철은 코뿔소처럼 캄캄한 땅속 어딘가에서 컥컥거리며 튀어나올 것이다 곧 낯선 얼굴들이 벼랑역에 또 도착할 것이다 하루 종일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다음 달부터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미안하다는 상사의 야릇한 표정 너머로
어서, 가족이 보고 싶었지만 결국 혼자인 것이다
그는 여전히,
- [발령 났다](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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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누기>

예전 드라마에 흔히 나오던 장면입니다.

한 가장(家長)이 회사로부터 권고사직을 당합니다. 그에게는 매달 아파트 대출금에 쪼들리는 아내와, 해외연수를 꼭 가야겠다고 벼르는 대학생 딸과, 영어 과외를 받아 명문대 가고 싶어 하는 아들이 있습니다.
차마 회사에서 잘렸다는 말을 못하고 아침마다 도시락 든 채 집을 나옵니다. 도서관에 가본들 손에 책이 잡히지 않습니다. 공원을 빈둥거리니 다들 저 같은 벼랑 끝 인생뿐입니다.
그에게 갈 곳이 없습니다. 그래도 아내와 자식들에겐 씩씩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시처럼 “어두워지는 도시를 내다보면서 그는 괜찮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로 들어갑니다.

“눈물은 오래 참다 뚝 떨어지는 순간 저 바닥까지는 천길 벼랑과 같다”

평생직장이라 여기며 젊음을, 몸을, 혼을 다 갈아가며 다니던 직장에서 어느 날 '당신은 내일부터 나오지 않아도 됩니다'란 통보를 받았을 때, 절망 끝에 나오는 눈물이 바닥끝이 보이지 않는 벼랑에서 떨어집니다. 아무도 푸른 수심을 알 수 없는 깊은 수렁에 희망도 함께 떨어지고...

“함부로 등짝을 보이지 않으려고 동료들에게 말을 걸었을 뿐이다”

강제퇴직 당한 아는 이의 말을 들으니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은 집에 있는 아내도 자식도 아닌 자기를 지켜보는 동료의 눈이었다 했습니다. 그리고 다들 ‘수고했다’, ‘우리도 곧 뒤따를 건대, 뭐’ ‘인생은 새옹지마라 하잖아. 나중에 더 잘 될지 누가 알아’ 하는 전혀 도움 안 되는 말이었다고.

“시간이 씨발時가 되자 연기처럼 사무실을 빠져나와 짧은 사거리를 빠르게 흘러갔다”

어제까지 퇴근 시간은 ‘저녁에 누구랑 술 한잔 하지’ ‘참, 오늘이 아내 생일이잖아. 선물 준비 안 했다간 바가지 긁히겠는걸’ 이런 사소한 약속만 지키면 됐는데 갑자기 ‘씨발!’ 하고 욕지거리를 내뱉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 ‘씨발時!’ 어떻게 이런 시어를 만들어 냈을까요?

“곧 낯선 얼굴들이 벼랑역에 또 도착할 것이다”

이 시구를 읽으면 현재 직장생활 하는 이들은 쩌릿쩌릿할 겁니다. ‘구조조정’ ‘정리해고’ ‘희망퇴직’ 참 신기한 이런 용어가 일상이 되어 오늘 살았다고 하여 내일도 산다는 보장이 전혀 없는 직장생활.
저는 아주 다행히 그런 걱정 안 해도 되는 직장과 안전한 시절에 근무해서 최악의 사태는 피했습니다만 날마다 의식하며 사는 분들은 어떨까요? 평생직장이란 말은 이제 사전에서 사라질 낱말 가운데 하나라 합니다. 대신 평생가장이란 말은 평생 남아 돌겠지만.

이승하 시인이 이 시를 평하면서 아주 멋진 말을 했습니다. ‘가장에게 세상은 가장(假裝) 무도회장과 같다.’고. 상사의 옳지 않은 요구에도 한마디 반발 못하고, 동료들과의 암투에도 표정 변하지 않는 가면을 쓴 채로 살아야 하니까요.
그는 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심리묘사가 웬만한 심리소설 이상으로 잘 되어 있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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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성 시인(1961년생) : 강원도 양양 출신으로 2005년 [시작]을 통해 등단. 현재 서울시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매뉴얼대로 살아가는 감정노동자의 심리를 잘 파헤쳤다는 평을 들음.
동명이인으로 [슬픈 하이에나]란 시집을 펴낸 김연성 시인(1948년)도 계심.

(시인 정보는 인터넷에서 얻은지라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첫째 사진은 [Biz watch](2019. 12. 23)에서, 둘째는 [해남우리신문](2010. 8. 1) 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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