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길 걸어보세요

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85)

* 가을길 걸어보세요 *


산책길에 나섰습니다. 아침마다 운동 삼아 걷는 길과 코스는 같지만 시간은 다릅니다. 운동은 한 시간 동안 빠른 걸음으로 걸으니 주변을 보지 못하나, 산책은 느긋하게 걸으니 꽃도, 나무도, 벌레도, 열매도 눈에 담깁니다.
가을에는 어느 날이든 또 어느 곳이든 다 아름답지만, 특히 이맘때의 시골길을 걸어보라고 권합니다. 단풍이 들기 살짝 전의 모습이 오히려 화장하지 않은 자연미인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면 그냥 눈과 귀와 코로 가을이 마구 들어옵니다. 짬나지 않는 사람은 도시 가까운 곳을, 좀 짬이 나면 먼 곳을 걸어보세요. 가능한 차 없이 가라고 하고 싶지만 차를 몰고 가더라도 적당한 곳에 멈춘 다음 두 시간 정도의 거리를 걸으면 됩니다.
보이는 게 다 가을이요, 그러면 들리는 게 가을 소리요, 코로 들어오는 내음도 다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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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내마을 끝나는 지점에서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경로를 택했습니다. 비교적 경사가 적은 길입니다. 주변을 마음껏 보자는 뜻에서 천천히 걸었습니다. 마을 아랫길로 내려서자 꽃들이 반깁니다.
전경린이 소설에서 ‘여성의 질을 얇게 떠놓은 모습’이라고 표현한 아직 지지 않은 ‘물봉선화’가 얼굴을 내밀고, 도종환 시인이 ‘떠도는 넋처럼 가으내 / 자늑자늑 흔들리는’이라 표현한 ‘억새풀’도 보입니다.

슬픈 전설을 안은 쑥부쟁이와, 개미취 ㆍ 미역취 등의 취나물꽃과, 개구리꽃이라 이름 붙인 고마리... 뿐인가요, 빨간 열매들은 또 어떻고요. 찔레 열매, 청미래덩굴 (경상도에선 망개나무) 열매, 화살나무 열매의 붉은빛은 참 요염합니다.

85-3.jpg (쑥부쟁이)



조금 더 내려가자 산비탈에 이상하게 생긴 나무뿌리가 나타났습니다. 비 올 때마다 조금씩 보여주다가 이젠 다 벗었습니다. 마치 감추어야 할 치부가 비에 흙이 씻겨 보이지 않고 싶은 모습을 드러낸 듯합니다. 그래선지 잎조차 아래로 늘어뜨리나 감추기엔 역부족인 듯.
감추어야 할 치부를 감추지 못하고 드러낼 수밖에 없을 때의 심정을 겪어보지 않은 이라면 그저 모양 있게 생긴 나무뿌리에 지나지 않겠지만, 반대의 입장에 서 본 경험이 있는 이라면 다른 느낌을 가질지 모릅니다. 저만큼의 아픔을 지니고 산다는 게 또 얼마나 큰 아픔인지 ….

반쯤 갔을 때 두더지를 만났습니다. 예전에 쓴 글 ‘ 만병통치약 두더지 소금을 아시나요?’에서 언급한 적 있습니다. 물론 살아있는 녀석이 눈앞에 모습 보일 리는 만무. 비록 반듯한 자세로 나를 반기듯이(?) 떡 하니 길 한가운데 앉아 있지만.

반가움보다 더 큰 의문에 살펴보았더니 죽어 있었습니다. 두더지가 죽어 있다니 …. 까닭이 궁금했습니다. 땅 속에서 살고 있어야 할 게 땡볕이 내리비치는 시멘트 포장도로에 나와 있다는 것 자체가 의문이었습니다. 차에 치인 흔적이 없다. 그럼 농약 때문일까요?


85-4.jpg (찔레 열매)



아랫마을로 가려면 500m는 더 걸어야 합니다. 걷는 거야 상관없지만 혼자 걷기엔 조금 으슥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을이 익어가는 모습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온갖 열매들로 하여.

으름덩굴에 달린 으름 몇 개가 아직 달렸습니다. 제 친구들은 이미 다 떨어져 거름이 되었을 텐데 쟤들은 왜 아직까지 붙어 있을까요. 발길에 뭔가 채이는 게 있어 아래로 눈을 돌리니 쥐밤이 보입니다. 땅에 떨어진 지 제법 된 듯 썩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쥐밤은 산에서 야생하는 밤이라 하여 ‘산밤’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크기는 일반 밤의 1/4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 싱싱하다 해도 먹을 게 없습니다. 구워 먹으면 일반 밤보다 맛에서 뒤떨어지지 않건만...
쥐밤에 눈을 주다가 옆으로 돌리니 도토리가 보입니다. 아직 썩지 않았으니 그대로 두면 다람쥐가 양식하러 갖고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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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명O리에 도착하려면 한참이 남았습니다. 무엇이 나를, 우리를 반길까요? 가을길, 시골길, 마음 녹이는 길, 잠시 짬을 내 그냥 한 번 걸어보세요.

일도 내려놓고, 계산도 내려놓고, 몸과 마음 다 내려놓고, 너도 나도 내려놓고, 그저 아무 생각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면 가슴에는 가득찹니다, 평화가.


*. 오늘 글은 예전에 올렸는데, 내용을 보강하여 다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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