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92)
요즘 아침에 마을 한 바퀴 돌다 눈을 수평에서 20° 치켜뜨면 온통 빨간빛이요, 20° 아래로 내리뜨면 연보랏빛입니다. 빨간빛은 감나무마다 달린 토종감이 뿜어내는 빛깔이요, 연보랏빛은 쑥부쟁이가 온통 길섶을 물들임에서 오는 빛깔입니다.
꽃 이름을 사람들은 여러 이유를 만들어 붙입니다. 꽃 모양을 보고, 꽃에 달린 열매를 보고, 혹은 사람 이름을 끌어다 붙이기도 합니다. 백일홍(사실 '배롱나무')은 '백일' 동안 '붉다(紅)' 하여 지었고, 개불알풀 - 이젠 '봄까치꽃'이란 예쁜 이름을 얻었지만 - 은 열매 모습이 '개의 불알'을 닮아서 지었고, 양귀비꽃은 모습이 하도 붉고 이뻐 중국 4대 미녀 '양귀비'를 따서 지었습니다.
그런데 갖가지 꽃 가운데 쑥부쟁이 이름만큼 특별한 경우는 없을 겁니다. 왜냐면 전설에서 따와 붙인 이름이기 때문에. 쑥부쟁이 전설, 아시는 분이 꽤 되겠지만 혹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덧붙입니다.
“옛날 아주 깊은 산골 마을에 가난한 대장장이(순우리말로는 ‘불쟁이’)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대장장이의 큰딸은 병든 어머니와 열한 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돌보며 쑥을 캐러 다니는 착한 처녀였습니다. 쑥은 국으로도 쓰이지만 쌀가루를 섞어 버무린 '쑥털털이(쏙버무리)'는 한 끼 식량이 되었으니까요.
어느 날, 처녀는 산에 올라갔다가 사냥꾼에게 쫓기다 상처 입은 노루를 만나 숨겨주고 치료까지 주었습니다. 그러자 노루는 은혜를 꼭 갚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다시 길을 가던 처녀는 멧돼지를 잡기 위해 파놓은 함정에 빠져나오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사냥꾼을 보게 되었습니다. 처녀는 또다시 칡넝쿨을 잘라 아래로 내려 사냥꾼을 구해주었습니다.
사냥꾼은 아주 잘생기고 씩씩한 청년이었습니다. 첫눈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함께 지내던 사냥꾼 청년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내년 가을에 다시 찾아오겠노라'는 언약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던 가을이 되어도 사냥꾼 청년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몇 해 동안 그렇게 가을을 넘기면서 처녀는 애가 타는 그리움에 점차 야위어갔습니다. 산신령께 정성스럽게 치성을 드리던 어느 날 처녀 앞에 몇 년 전 목숨을 구해준 노루가 나타났습니다.
노루는 보랏빛 주머니에 담긴 노란 구슬 세 개를 주며,
“구슬을 하나씩 입에 물고 소원을 말하면 세 가지 소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처녀가 첫 번째 노란 구슬을 입에 물고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자, 어머니는 순식간에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두 번째 구슬을 입에 물고 사냥꾼 청년을 나타나게 해달라고 빌자 바로 그 자리에 애타게 기다리던 청년이 나타났습니다.
헌데 그는 이미 결혼하여 아이까지 두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욕심부리면 그의 아내와 아이가 불쌍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음씨 착한 처녀는, 마지막 세 번째 구슬을 입에 물고 사냥꾼 청년이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다시 홀로 남은 처녀는 마음속으로 그 청년을 끝내 잊지 못하던 어느 날 그만 절벽을 지나다 발을 헛디뎌 죽고 말았습니다. 이듬해 처녀가 죽은 그 자리에 잎이 무성하게 자랐고, 연보랏빛 아름다운 꽃이 피어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처녀가 죽어서도 배고픈 동생들이 나물로 뜯어먹을 수 있게 다시 태어났다고 여겼습니다. (쑥부쟁이 어린순은 나물로 먹음) 그리고 그 꽃의 연보랏빛 꽃잎은 노루가 준 주머니요, 노란 꽃술은 그 안에 있던 세 개의 구슬이라 여겼습니다.
그 꽃은 아직도 그 청년을 기다리듯 해마다 가을이면 꽃대를 길게 빼고 연보랏빛으로 곱게곱게 피어납니다. 사람들은 그 꽃에다 ‘쑥을 캐러 다니는 불쟁이 딸’의 영혼이 들었다는 뜻을 담아 ‘쑥부쟁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쑥 + 불쟁이 > 쑥불쟁이 > 쑥부쟁이)
여기서 드는 의문은 ‘왜 전설은 끝에 주인공을 죽게 만드는가?’입니다. 꼭 주인공이 죽어야 전설이 되는가? 사실 전설의 주인공은 죽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널리 알려진 '망부석 전설'만 해도 박제상의 아내가 죽어 돌로 굳어져 '망부석'이라 불리고 있으니까요.
굳이 주인공이 죽지 않은 전설도 찾자면 드물지만 있긴 합니다. 울산시 남구 황성동 세죽마을에서 약 150m 떨어진 바위섬 '처용암'에 딸린 전설. 아시다시피 신라 헌강왕 때 생겨난 이 전설은 용왕의 아들 처용이 나온 바위라 하여 이름 '처용'에다 바위 ‘암(巖)’ 자를 붙여 '처용암'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꽃 전설은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과문의 탓인지 주인공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 상태에서 만들어진 꽃 전설은 못 본 듯합니다. 능소화 전설, 나팔꽃 전설, 수선화 전설, 장미꽃 전설. 참 제가 만든(얼마 전에 배달한) 나팔꽃 스토리텔링조차 주인공을 죽게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가을엔 들국화가 이곳저곳에서 피어납니다. 우리는 흔히 '들국화'라 부르지만 사실 들국화란 이름의 꽃은 없습니다. 구절초, 개미취, 갯국화, 벌개미취, 산국, 감국, 쑥부쟁이, 금불초, 뇌향국화, 해국(海菊)을 통칭하여 들국화라 할 뿐.
이 가운데 구절초와 벌개미취와 쑥부쟁이는 구별하기 좀 어렵습니다. 그래서 들꽃 관찰하러 가서 이 셋을 구별할 줄 알면 ‘제법이다’는 말을 듣습니다. 다만 쑥부쟁이는 만개했을 때 빛깔이 연보랏빛으로 비교적 구별이 쉽습니다. (이 셋을 구별하는 방법이 인터넷에 무수히 소개돼 있으니 참고 바람)
쑥부쟁이와 그 전설. 아니 모든 꽃에 딸린 비극적 전설이 슬프기만 해서 좋은 건 아니라고 봅니다. 소위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식의 해피엔딩도 좋지 않을까요. '새드엔딩'보다야 강렬함은 줄을지언정.
쑥부쟁이에 관한 글 쓰면서 또 다른 글감 하나 얻었다고 해야 할까요, 숙제 하나 얻었다고 해야 할까요? 가을이 끝나기 전에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꽃 전설을 하나 붙잡으려 합니다. 어느 꽃이 희생양(?) 될지...
너무 흔해 관심 밖의 꽃,
인간의 사랑을 부담스러워하는 꽃
그냥 지나쳐가 주기를 바라는 꽃
하나보단 둘이, 둘보단 셋이 함께 피기를 좋아하는 꽃
바람과 햇살과 친구 들꽃의 사랑만을 바라는 꽃
이번 휴일 산과 들을 지나다 슬쩍 눈도장만 찍고 오시길...
*. 제목으로 쓴 유감의 한자로 ‘有感’과 ‘遺憾’이 있는데 둘은 뜻이 다릅니다. 앞은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느낌이 남아 있다’는 뜻임에 반하여, 뒤는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함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오늘 글은 예전에 올렸습니다만, 내용을 보강하여 다시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