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0편 : 고영민 시인의 '계란 한 판'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고영민 시인 편 ♡
- 계란 한 판 -
대낮, 골방에 처박혀 시를 쓰다가
문 밖 확성기 소리를 엿듣는다
계란... (짧은 침묵)
계란 한 판... (긴 침묵)
계란 한 판이, 삼처너언계란... (침묵) ...계란 한 판
이게 전부인데,
여백의 미가 장난이 아니다
계란, 한 번 치고
침묵하는 동안 듣는 이에게
쫑긋, 귀를 세우게 한다
다시 계란 한 판, 또 침묵
아주 무뚝뚝하게 계란 한 판이 삼천 원
이라 말하자마자 동시에
계란, 하고 친다
듣고 있으니 내공이 만만치 않다
귀를 잡아당긴다
저 소리, 마르고 닳도록 외치다
인이 박여 생긴 생계의 운율
계란 한 판의 리듬
쓰던 시를 내려놓고
덜컥, 삼천 원을 들고 나선다
- [악어](2005년)
<함께 나누기>
어릴 때 아침이면 창턱 너머 장사치 외치는 소리, “재첩국 사이소!”와 “조푸 사이소!” 조푸는 지금으로 말하면 두부. 저녁 땀이면 아침에 외치던 아주머니 소리 대신 굵은 사내 장수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요. "찹쌀떡!", "망개떡!"
다른 동네에서는 ‘메밀묵 사려!’ 하는 소리도 들렸다 하던데 우리 동네에선 망개떡 아니면 찹쌀떡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찹쌀떡 장수 외치는 소리가 우리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왜냐면 그 장수는 ‘찹쌀’까지는 정확히 들리게 발음하는데 마지막 떡 소리는 들릴 동 말 동이었으니까요.
저도 들을 때마다 왜 저 뒷말 ‘떡’을 저리 약하게 하나 늘 궁금했지만 저보다 더 성질 급한 아버지는 아예 밖에 나가 따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그 동네 대빵이셨던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리긴 싫었던지 잠시 ‘찹쌀떡!’ 하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찹쌀’까지만 발음하곤 역시 떡은 거의 생략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떡장수가 오늘 시처럼 일부러 여백의 미를 살리려는 기교를 부린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까 60년이 다 된 지금까지 제가 기억하고 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들었으니까요. (예전에 이를 소재로 '생활글" 한 편 씀)
“대낮, 골방에 처박혀 시를 쓰다가 / 문 밖 확성기 소리를 엿듣는다”
모든 창작 예술인에게 소음은 정말 싫을 겁니다. 특히 머릿속을 짜내 한참 작품 만드는 중이라면. 이럴 때 확성기를 통한 ‘계란 사라!’ 그 외침은 분명 소음입니다. 헌데도 화자 귀에 들리는 계란 장수의 외침은 좀 달라서 그를 끌어당겼습니다.
“계란... (짧은 침묵) / 계란 한 판... (긴 침묵) / 계란 한 판이, 삼처너언계란...(침묵)...계란 한 판”
오감(五感) 가운데 청각을 가장 잘 활용하는 문학을 시라 합니다. 운율을 살려 읽으면 그 소리가 아주 멋지게 들리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장면에선 청각뿐 아니라 시각도 살린 종합예술입니다. 마치 드라마나 영화의 극본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읽는 이로 하여금 절로 그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니까요.
이 부분을 그냥 단순히 글로 여겨 눈으로 읽고 만다면 그리 감흥이 크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글벗님들에게 부탁드립니다. 꼭 자신이 계란장수 되어 외쳐 보고, 손님 되어 들어보시기를. 그러면 시의 맛을 특별히 더 느낄 겁니다.
“이게 전부인데, / 여백의 미가 장난이 아니다”
여백의 미에 담긴 건 무엇일까요? 소음이었을 계란 장수의 외침이 왜 시인에게 여백의 미로 남았을까요. 다음에 이어지는 시행에서 답이 나옵니다.
"저 소리, 마르고 닳도록 외치다 / 인이 박여 생긴 생계의 운율"이 계란 한 판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인이 박여 생긴 생계의 운율', 이 시구 하나로 시 품격이 높아졌습니다. 비록 기계로 녹음된 소리이지만 그 소리에는 한 판이라도 더 팔아야 가족이 먹을 한 끼 양식을 얻을 수 있기에 생계의 운율이 되었습니다.
“쓰던 시를 내려놓고 / 덜컥, 삼천 원을 들고 나선다”
이런 '생계의 운율'을 듣게 된다면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그 소리에 끌려 나올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고 보니 계란 장수의 외침에 담긴 여백의 내공도 대단하지만, 그걸 감지해 시로 풀어놓은 시인의 내공까지 감탄할 만합니다.
이젠 좀체로 들을 수 없는 생계의 운율을 지닌 장사치의 내공 담긴 외침 소리가 그립습니다.
“찹쌀~~~떡!” “조푸 사이소!” “재첩국 사이소!” “메밀묵 사려!” “세탁~~끄!” “데기, 데기, 뻔데기!” “고물 삽니다. 라지오 삽니다, 금이나 은이나 삽니다!" "딲스!, 딲스! 신 딲스!” “아이스케키!, 아이스~케키!, 아이~스~케키”
#. 고영민 시인(1968년생) : 충남 서산 출신으로 2002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친근한 언어로 정통 서정시 문법에 충실한 시를 쓴다는 평가를 받으며, 현재 ‘포스코교육재단’에 근무.
(시인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에서 얻은지라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