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 비움과 채움의 꽃

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93)

* 백일홍, 비움과 채움의 꽃 *



이십여 년 전 ‘전라도 문학기행’이란 이름 아래 섬진강 시인으로 유명한 김용택 시인을 만나러 간 적 있습니다. 시인이 근무하는 운암초등학교 마암분교를 찾아갔는데 학교에 도착하는 순간 ‘아!’ 하고 그만 감탄사를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분교에서 바로 내려다보는 곳에 거울같이 잔잔한 물결의 호수가 있지 않은가요. 바로 ‘옥정댐’이었습니다. 그림 같다고 해야 하나, 사진 같다고 해야 하나. 물결이 가만있으면 정물화 또는 사진인데, 바람에 살랑살랑 움직이면 또 다른 그림이 되었습니다.


제가 바로 그 말을 꺼냈습니다.

“여기 근무하시면 그냥 시가 나오겠습니다.”

그 말을 받아 시인이,

“오는 사람들마다 다 그런 말을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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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큰 저수지를 둔 곳이 아니더라도 시골, 그 가운데서도 산골에 살면 글감이 많이 생깁니다. 개미, 거미, 달팽이, 지렁이 같은 벌레들의 움직임만 봐도 쓸 거리가 주렁주렁. 계절마다 피었다가 사그라지는 풀꽃, 온갖 꽃과 열매로 치장하는 나무, 그리고 가지가지 새들과 그들이 내는 울음소리.


어제 우리 집 마당 잔디밭을 고르고 난 뒤 이곳저곳 둘러보다 백일홍에 눈이 꽂혔습니다. 아직도 꽃이 다 안 떨어지고 피어 있어서입니다. 우리 집에 자라는 나무들은 주인을 닮아선지 대체로 늦습니다.

영산홍도 ‘늦영산홍’이요, 백일홍도 ‘늦백일홍’이요, 뽕나무 열매도 ‘늦오디’입니다. 즉 다른 곳에선 한창 피고 있는데 우리 집에선 아직 기미를 보이지 않거나, 남의 집엔 질 때쯤 가리늦게 피거나.


백일홍(百日紅)은 이름에 담긴 뜻 그대로 ‘백일’ 동안 ‘붉게(紅)’ 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아시다시피 백일홍은 두 가지입니다. 종류가 두 가지가 아니라 전혀 다른 두 가지를 우린 백일홍이라 합니다. 단지 석 달 가까이 붉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두 가지는 ‘나무백일홍’과 ‘꽃백일홍’. 우리가 흔히 보는 나무백일홍은 배롱나무이며, 꽃백일홍이 진짜 백일홍입니다. 둘의 차이는 확연합니다. 꽃백일홍은 국화과에 속하는 한해살이풀이고, 나무백일홍은 부처꽃과에 속하는 나무이기에.


오늘 글의 글감은 나무백일홍, 즉 배롱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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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백일홍을 무덤 주변에 많이 심었습니다. 오랫동안 꽃이 피어 영원한 생명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그리 했습니다. 헌데 언제부턴가 가정집에도 심게 됐습니다. 정확한 까닭은 알 수 없으나 백일홍의 꽃말이 ‘부귀’라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이유와 관계없이 집에도, 어떤 지자체에선 가로수로 심기도 합니다. 까닭은 나무 형태 즉 수형(樹形)이 너무 예쁘기 때문입니다. 정원에 심고선 따로 손질할 필요 없이 그냥 놔두면 저가 알아서 이리 뒤틀, 저리 뒤틀 하여 예쁘게 모양냅니다.


헌데 한 번이라도 백일홍을 관찰해 본 적 있는가요? 하나의 꽃이 백일 동안 피어있는 줄 알겠지만 사실은 며칠 가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늘 피어 있는 것처럼 느끼는 건 한 송이가 지고 난 다음에 그 빈 곳에 다른 송이가 나와 그곳을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즉 한 가지에서 꽃이 피었다가 자리를 비우면, 다른 가지에 꽃이 채웁니다. 이렇게 비움과 채움의 과정이 거듭되다보니, “아, 백일홍은 백일 동안 피어있구나.” 하게 된다. 그런 뜻으로 하여 이름도 얻었고요.


성현들은 물론, 조금이라도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비움과 채움’을 한 번쯤 건드리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보다 폼 나는 글감도 없기 때문입니다. ‘채우기 위해선 먼저 비워야 한다. 채우기에만 욕심 부리면 안 된다.’ 이런 이치를 많은 이들이 설파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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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업원 열댓 명의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아는 이에게서 들은 얘기입니다.


어릴 때 바로 이웃에 살던 또래친구와 헤어진 뒤 삼십 년이 지나 우연히 길에서 만나게 되었다 한다. 처음엔 못 알아보았으나 그쪽에서 먼저 아는 체를 해 인사 나누다 옛 벗임을 확인하고 반가움에 껴안고 야단도 그런 법석이 없었다나.

가까운 카페로 옮겨 서로 살아온 일을 얘기하다 알게 된 사실은 그 벗은 현재 목사로 일하고 있다는 내용. 그 말에 더욱 기뻤단다. 왜냐하면 자기도 교회 장로인데 까마득히 잊고 살던 벗이 목사가 되었다 하니.


그 날은 다른 약속 때문에 찾아가지 못하고 며칠 뒤 보내준 주소로 찾아갔을 때였다. 찾아는 갔는데 실망 또 실망... 차마 교회라 이름 붙이기 곤란할 정도로 시장통에서 벗어난 빈민가에 십자가 달 자리도 없는 허름한 건물이었으니까. 들어가서야 교회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나.

아는 이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비하여 너무나 초라한 모습에 무척 실망했는데 사연을 들어보니 고개를 끄덕였단다. 그 벗은 다른 일 하다 늦은 나이에 신학교를 들어갔고 나와 보니 큰 교회는 연줄 없어 못 가고 소위 개척교회의 길로 나가기로 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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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아내와 약속했단다. 아내가 보험설계사로 벌어오는 적은 돈은 생활비로 쓰고, 교회에 들어오는 돈은 모두 사회에 돌려주기로. 그곳은 빈민가라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도 많은 동네.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되면 시에서 혜택이 주어지지만 그건 사람은 일부.

(여러 이유로 하여 실제 생활은 어렵지만 혜택 못 받는 사람이 더 많은 게 현실)

교회는 점심 때 국수를 먹으러 오는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북적. 그 북적북적임이 그리도 좋았대나. 문제는 수입은 한정돼 있어 얼마 안 가 그만둬야 할 처지에 몰리기 일쑤. 그랬는데 꼭 그럴 때마다 누군가의 후원이 뒤따르고.


그때부터 목사의 마음속엔 이 말을 두고 기도를 했답니다.

“주님 제가 비우니까 주임이 채워주셨습니다.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국수 못 삶을 고비는 여러 번 있었지만 한 번도 국수를 삶지 못한 일은 없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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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 있는 사해(死海)와 갈릴리호수의 거리는 100km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둘은 너무 다릅니다. 사해는 들어오는 물을 채울 뿐 비워주지 않는데 갈릴리호수는 물이 채워지기도 하고 그 물이 빠져나가기도 합니다. 그 결과 사해는 비우지 않으니까 염도가 높아져 아무것도 살 수 없는 죽음의 호수가 되었고, 갈릴리호수는 들어오는 만큼 비워주니 살아 있는 호수가 되었습니다.


다시 제 눈길은 얼마 남지 않은 백일홍에 머뭅니다.

만약 처음 핀 백일홍 빨간 꽃송이가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다면 다른 꽃이 피어날 공간이 없습니다. 그 자리를 비워주기 때문에 다음에 다른 꽃이 피어납니다. 결코 처음 핀 꽃들이 온 백일을 다 채우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백일홍이 아름다운 건 채우기 때문이 아니라 비움에서 온다는 것을. 사해보다는 갈릴리호수의 길을 택한 백일홍. 이제 곧 꽃이 다 사라질 테지만 내년에 다시 필 백일홍을 상상해 봅니다. ‘비우고 채우고’의 반복. 빨간 꽃이 눈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합니다.


*. 오늘 글은 예전에 올렸는데, 내용을 보강하여 다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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