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한 소통(485)

제485편 : 문태준 시인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 날'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문태준 시인 편 ♡


- 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 날 -


못자리 무논에 산 그림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물처럼
한 사람이 그리운 날 있으니

게눈처럼, 봄 나무에 새순이 올라오는 것 같은 오후
자목련을 넋 놓고 바라본다

우리가 믿었던 중심은 사실 중심이 아니었을지도
저 수많은 작고 여린 순들이 봄 나무에게 중심이듯
환약처럼 뭉친 것만이 중심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그리움이 누구 하나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아닌지 모른다
물빛처럼 평등한 옛날 얼굴들이
꽃나무를 보는 오후에
나를 눈물 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믐밤 흙길을 혼자 걸어갈 때 어둠의 중심은 모두 평등하듯
어느 하나의 물이 산 그림자를 무논으로 끌고 들어갈 수 없듯이
- [맨발](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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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누기>

천동설(지구중심설)은 오랫동안 천문학을 지배해 온 학설이었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모든 천체가 지구를 돈다는 이론이었지요. 지동설(태양중심설)은 그에 비해 코페르니~가 주장하고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증명한, 태양이 중심에 있고 지구가 공전한다는 현대 천문학의 기초가 된 이론입니다.
여기서 중심을 지구에 두는가, 아니면 태양에 두는가가 두 이론의 큰 차이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중심의 위치, 개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집니다. 왕조사회에서는 왕이 중심에 있고 그 주변에 신하, 그 아래 백성이 있었다면, 민주사회에서 중심은 일반 백성입니다.

“못자리 무논에 산 그림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물처럼 / 한 사람이 그리운 날 있으니”

무논(물이 괸 논)에는 고요히 물이 흘러들어옵니다. 거기에 해 질 녘이면 산 그림자가 서서히 밀려들고. 이렇게 고요히 산그림자가 밀려들 듯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내려앉는 저녁입니다.

“게눈처럼, 봄 나무에 새순이 올라오는 것 같은 오후 / 자목련을 넋 놓고 바라본다”

화자의 눈에 춥고 삭막한 겨울이 지나자 자목련 나뭇가지에 작은 게눈 모양처럼 뾰족하게 돋아나는 연둣빛 새순이 띕니다. 그 생동감, 그 생명력에 따스한 봄날의 오후 아무런 잡념 없이 넋을 잃을 정도로 깊은 감동과 아름다움을 느끼며 자목련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믿었던 중심은 사실 중심이 아니었을지도”

원래 화자는 봄에 나무가 생명력을 발휘함이 나무의 굵은 줄기 덕이거니 여겼습니다. 그렇지요, 여태까지 거대하고 단단한 것만이 중요하다는 사고에 사로잡혔으니까요.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저 수많은 작고 연약해 보이는 '어린순들이 봄 나무의 중심임'을 깨달았습니다. 가운데서 무게 잡고 서 있기에 중심이 아니라 생명 탄생에 기여한다면 모두가 다 중심인 것을.

“나의 그리움이 누구 하나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아닌지 모른다”

봄 나무에서 중심은 굵은 줄기가 아니라 여리고 어린순임을 깨닫자 문득 내 그리움의 대상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한 사람을 향한 그리움에 그쳤다면 이제는 그 주변 것들을 다 포함하는 그리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면 그 어머니에만 그쳤는데, 이제는 그에 더하여 고향이 생각나고, 고향 하늘에 닿을 듯 달려있던 감나무의 까치밥도, 장독대 한 구석에 피던 봉선화와 채송화도, 한여름밤 모깃불과 반딧불, 잔잔히 흐르던 미리내(은하수)의 물결, 소꿉친구랑 놀던 타작마당도 함께 떠오르니까요.

“그믐밤 흙길을 혼자 걸어갈 때 어둠의 중심은 모두 평등하듯 / 어느 하나의 물이 산 그림자를 무논으로 끌고 들어갈 수 없듯이”

이 두 시행은 아주 비유적입니다. 만약 우리가 깊은 어둠 속에 놓이게 되면 똑같이 외롭고 절망적이라는 점에선 다 평등합니다. 또한 무논에 산 그림자가 비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물이 산 그림자를 끌어들이거나 비치지 못하게 막거나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모든 중심은 평등합니다. 우리 사는 세상에 제 아무리 뛰어나도 중심이라고 부를 단 한 사람은 없고, 사물 역시 중심이라고 부를 단 하나는 없습니다. 왜냐면 각자 자기 나름의 중심을 다 지니기에. 어느 중심만 중요하고 다른 중심은 중요치 않다 하면 잘못입니다. 모든 중심은 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요즘 이 이론을 뒤집어놓는 현상이 세상을 뒤집어놓고 있습니다. 세계는 이 나라 저 나라의 어울림이 중심이었건만, 이젠 미국만이 세상의 중심이 돼 버렸습니다. 트럼프 한 마디가 정의요, 법이 돼 버렸습니다. 다른 나라는 우수마발 (牛溲馬勃 : 소 오줌과 말의 똥)밖에 안 됩니다. 누구도 토를 달다간 큰일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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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태준 시인(1970년생) : 경북 김천 출신으로 1994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 37세의 어린(?) 나이로 권위 있는 ‘소월시문학상’을 받아 차세대 가장 주목받는 시인으로 평가받음. 현재 [불교방송] PD이며, 모 신문에 ‘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를 연재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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