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125)
‘설거지’를 사전에서 찾으면 전혀 다른 두 가지 뜻이 나온다. 하나는 다 아는 바와 같이 ① ‘음식을 먹고 난 뒤 그릇을 씻어 정리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② ‘비가 오려고 할 때, 비에 맞으면 안 되는 물건을 치우거나 덮는 일’로.
한자어가 아닌 대부분의 토박이말은 사전에서 찾아보면 그 뜻이 서로 비슷하거나 아니면 조금 다르다. 헌데 설거지는 가만 보면 상대적이다. 즉 ①은 어떤 일이 이뤄진 뒤 하는 ‘뒤처리’라면, ②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대비하다’의 뜻이니까.
이 가운데 특히 ②를 그냥 설거지라 하기보단 비설거지라 한다. 아마 도시에선 잘 들어보지 못한 말이겠지만 시골에선 줄창 쓰는 말이다. ‘비 올 것 같으니 비설거지해라’, ‘비설거지가 채 끝나기도 전에 소나기가 쏟아졌다’ 등의 예문을 보면 짐작하리라.
지역에 따라서는 비 단도리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비설거지든' '비 단도리'든 잊어버리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만약 고추를 말리는데, 무를 썰어 소쿠리에 담아(무말랭이)를 햇볕에 놓아두었는데 비가 왔다면...
우리 집은 시골이라 비설거지를 해야 할 때가 잦다. 요즘 같이 뜨거운 볕살이 내리쬘 때는 빨래를 빨랫줄에 널어놓으면 곧잘 마른다. 또 한여름에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서 늘어놓거나, 지난주처럼 양파를 뽑은 뒤 며칠 동안 밭에 좀 마르라고 그냥 두면 절로 숙성도 되면서 잘 마른다.
헌데 빨래든 고추든 양파든 말리려고 밖에 널어뒀는데 비가 오면 큰일이다. 빨래야 한 번 더 하면 상관없으나 고추와 양파는 문제가 심각하다. 일단 고추나 양파는 비 맞으면 썩기 쉽다. 그러니 비 내린다는 예보 있으면 미리 대비해 치워야 한다. 이때 비설거지가 필요하다.
한때 오랫동안 우리들 머릿속에 세뇌된 한자성어가 있다. 바로 ‘유비무환’. 준비가 돼 있으면 화근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의 이 말을 잘 알고 있으리라. 이 용어를 정권 유지에 이용하지 않고 삶에 도움 되는 방향으로 이끌었으면 좋았을 텐데... 유비무환도 굳이 따진다면 비설거지에 해당하리라.
단독주택에 살면, 특히 오래된 주택에 살면 비설거지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 비 새는 곳을 미리 살펴 막아야 하니까. 아시다시피 한 번 비가 새면 그곳은 점점 더 비가 많이 새 급기야 집의 기초를 썩게 하여 무너지게 만든다.
비설거지를 글감으로 쓰다 보니 두 편의 시가 떠오른다. 한 편은 프랑스 요절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내 마음에 비가 내린다」의 일부다.
“거리에 비가 내리듯
내 맘 속에 눈물이 나를 적신다.
가슴속을 파고드는
이 우울함은 무엇이런가?”
마음속 우울함, 랭보는 마음속 비설거지를 못해서일까? 3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다음으로 이선영 시인의 「비가 앞질러 오다」의 일부다.
“여름밤 빗소리가 자꾸만 당신 발자국 소리로 들리는데
발자국은 오다가 끊기고
당신보다 한 발짝 비가 앞서 오다
발을 가진 당신보다
발이 없는 비가 빠르게 오다”
‘발을 가진 당신보다 발이 없는 비가 더 빨리 온다’ 언제고 써먹기 좋은 시구이지 않은가. 역시 마음에도 비설거지가 필요한 것 같다.
*. 오늘 글은 예전에 올렸는데, 내용을 보강하여 다시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