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1편 : 이병률 시인의 '이 넉넉한 쓸쓸함'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이병률 시인 편 ♡
- 이 넉넉한 쓸쓸함 -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저녁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자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두더라도
우리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 [바다는 잘 있습니다](2017년)
<함께 나누기>
오늘 시는 그냥 한 번 읽고 다시 한 번 더 읽어보시길. 제 해설보다 처음 들어온 맛을 즐기시기를.
제목에서부터 시선을 끕니다. 일단 '넉넉한'과 '쓸쓸함'은 함께 쓸 수 없는 낱말입니다. ‘넉넉한’을 살리려면 '넉넉한 행복(사랑)'이거나, ‘쓸쓸함’을 살리려면 '부족한(고독한) 쓸쓸함'이 되어야 함에도.
이처럼 앞뒤가 전혀 다른 시어로 묶여 있을 때 ‘모순 형용’이니 '역설적 표현'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 시에선 제목에서만 아니라 군데군데 그런 표현이 보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나이 드신 분들에겐 좀 익숙지 않은 이름일지 몰라도 이병률 시인은 소위 인기 있는 작가입니다. 펴내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까요. 사람들에게 많이 팔리는 시집이나 산문집을 펴냈다는 말은 그만큼 표현력이 살아 있다는 뜻이겠지요.
화자가 생각할 때 현재 우리 사회는 사랑이 부족한 사회로 진단합니다. 사랑이 부족했기에 나도 사랑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다는. 이 표현에 제가 더 뜨끔합니다. 이성에 대한 사랑이야 한 여인에게만 준 사랑으로 만족하겠으나, 제자들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많이 부족했기에.
“무심함을 / 단순함을 /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1연에 이어 2연에 이르면 왜 이 시인이 인기 있는지 알 수 있겠지요. 평범한 듯하지만 특별한 맛을 주는 표현. 무심함과 단순함을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기피합니다. 왠지 정이 없어 보이고, 왠지 세련돼 보이지 않아서.
헌데 시인은 그 둘을 오래 바라보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의 소란함이나 복잡한 계산에서 벗어나, 무심하게 단순하게 대상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깊게 응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자고.
“저녁빛이 마음의 내벽 /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저녁빛이 몰려드는 때는 고요와 적막에 이어 쓸쓸함이 마음 구석구석 퍼져나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런 쓸쓸함 속에서도 무언가 - 사랑, 위로, 자기만족 - 내면에 꽉 차오르길 기다려봅니다.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다’라는 표현은 고급스럽게는 광활한 우주 속에서 인간의 존재가 찰나의 점처럼 작고 보잘것없다는 뜻으로 봐도 되고, 달리 인간이 처음 생성될 때 정자가 난자에 수정되어 생긴 배아는 하나의 점 크기밖에 되지 않기에 그렇게 표현했다고 봐도 됩니다.
이리 보면 우리네 삶이 위대할 수도 보잘것없을 수도 있습니다. 즉 나의 삶을 능동적으로 개척하며 '살았는지' 아니면 고단한 현실을 그저 '견디기만(버티기만)' 하고 살았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면 알 수 있겠지요.
“우리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마지막 시행에서 다시 모순 형용이 나타납니다.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이라니요. ‘꽃이 필 때처럼 황홀한 아침’이면 몰라도. 여기서 제목을 잠시 끌어와 봅니다. ‘넉넉한 쓸쓸함’ 즉 꽃이 피면 분명 넉넉해집니다. 꽃도 넉넉해지고 그걸 바라보는 우리네 마음도 넉넉해지고.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길어야 한 달, 짧으면 며칠 안 가 떨어집니다. 떨어지면 또다시 쓸쓸해지고. 이러니 꽃이 핀다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임에도 이별은 그렇게나 아픔을 주는 일이니 쓸쓸할 수밖에요.
이 시를 위와 달리 현대 사회의 모순을 묘파했다는 식으로 이해해도 됩니다. 즉 현실은 겉으론 넉넉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쓸쓸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사람과 사람 사이도 그렇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는지. 그러나 정말 옛날 관중과 포숙 같은 믿음을 주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요.
#. 이병률(1967년생) : 충북 제천 출신으로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한때 ‘MBC FM 이소라의 음악도시’ 등 구성작가로 활동했으며, 출판사 [달]의 대표임. 시집보다는 '여행기' 같은 산문집을 더 많이 펴내며, 펴내는 책마다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