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고라니야

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131)

* 미안하다, 고라니야 *



우리 집에는 개를 비롯 큰 동물을 키우지 않습니다. 사실 벌레로 불리는 지렁이, 거미, 벌, 개미는 지가 알아서 자리 잡았지만. 그러면 큰 동물은 우리 집에 없어야 하는데 수시로 드나드는 녀석이 제법 됩니다. 새 말고도 길고양이, 고라니, 노루, 너구리...

가끔 반려동물 관련 TV 프로그램을 보면 길고양이에게 사료를 제공하고 심지어 집에 데려와 반려고양이로 키우는 착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이 보면 욕하겠지만 저는 아직도 길고양이를 쫓아냅니다. 녀석들로부터 당한 피해의식 때문에.

한 번은 창고 문을 열다 갑작스럽게 뛰쳐나온 길고양이 때문에 놀라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다행히 엉치뼈는 부러지지 않았으나 그 후유증으로 허리가 아파 한의원을 제법 오래 다녀야 했습니다.
또 한 번은 창고 쪽에서 뭔가 후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찢어지는 듯한 비명 들리다가 이내 끝났습니다. 가보니 어미박새와 갓 깨어난 새끼 두 마리가 떨어져 죽어 있고, 아직 깨지 않은 알 세 개도 박살났습니다. 뿐인가요, 오디 떨어지면 흠 없이 받으려고 펼쳐놓은 그물 위에 똥을 싸 수확 못하게 만들고, 비닐하우스도 찢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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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비하면 고라니는 양반입니다. 한 번씩 들러 남새를 뜯어먹기는 하나 저 좋아하는 고구마 주위에 울타리 쳐 못 들어가게 하면 그뿐.
그런데... 지난 주 수요일 가랑비 내리는 날 밤, 녀석이 우리 집에 들렀든가 봅니다. 전엔 고구마 줄기 뜯지 못하면 그냥 돌아갔는데... 아침에 일어나 텃밭에 나갔더니 여태 한 번도 건드린 적 없는 상추를 다 뜯어먹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박과 참외 줄기가 한창 뻗어가고 있는데 거기를 얼마나 많이 오갔는지 짓이겨 놓았습니다. 어떻게 고라니인 줄 알았냐구요? 산골에 오래 살다 보면 행패 부린 녀석들의 흔적을 척 보면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똥입니다. 고라니똥은 다른 짐승의 똥과 차이 납니다. 혹시 염소똥 보신 적 있다면 그와 비슷하면서 조금 작습니다. 마치 제 맛있는 먹이(고구마 줄기)를 내놓지 않았다 행패 부린듯 상추밭을 깡그리 뜯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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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고민했습니다. 상추만 뜯어먹는다면 울타리 안쪽 빈터에 심으면 됩니다. 문제는 다른 남새도 건드릴 수 있다는 겁니다. 원래 쳐놓은 울타리 밖에 자라는 열무, 호박, 수박, 참회, 오이, 토마토, 가지, 땅콩...
사실 위에 나열한 작물 모두를 고라니가 먹진 않을 겁니다. 허나 이미 안 먹던 상추를 뜯어먹었으니 다른 작물을 그냥 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상추는 약을 치지 않아도 병들지 않고 싱싱하게 자라는 거의 유일한 남새입니다. 그래서 고라니도 여태 그냥 둬 앞으로도 괜찮겠지 했는데...

결국 아내와 의논 뒤 밭작물 심은 전체에 울타리를 치기로 했습니다. 철물점에 가서 고라니망을 사와 치는데 시간은 그리 걸리지 않습니다. 앞으로 고라니는 우리 집 텃밭을 넘보지 못할 겁니다. 멧돼지라면 몰라도 고라니가 울타리를 부수고 들어간 적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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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내가 왜 이리 쩨쩨해졌지.’ 하는 생각에 조금 우울했습니다. ‘고라니가 먹으면 얼마 먹는다고.’ 하다가, 아닙니다, 고라니가 얼마 안 먹지 않습니다. 녀석은 한 번 노린 걸 다 먹어치울 때까지 계속 내려오니까요.

그래도 미안했습니다. 사실 제가 사는 이곳은 원래 고라니가 살던 터전이었는데 우리가 침범한 셈이니까요. 텃밭이랍시고 만들어 심어놓은 남새들이 야생의 잡초들보다 훨씬 부드럽고 맛도 있으니 와서 뜯어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고라니가 사람 사는 마을로 내려와선 안 됩니다. 그깟 밭작물 해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해서입니다. 산골 차량동물사고, 일명 ‘로드 킬’로 희생되는 으뜸 동물이 길고양이라면 다음이 바로 고라니입니다.
자주는 아니나 한 달에 한 번쯤은 차 몰고 가다보면 보입니다. 물론 죽은 상태입니다만 아마 박은 차도 성하지 못했을 겁니다. 야행성인 고라니는 강한 불빛을 받으면 달아나지 못하고 꼼짝없이 섰다가 과속으로 달려오는 차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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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동안 야생동물 위한답시고 그런 내용의 글을 올린 적 몇 번 됩니다. 허나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길고양이에게 몇 번 피해입었다고 걔들을 쫓아내고, 고라니에게 상추 좀 뜯겼다고 울타리 치고...
참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고라니와 잘 지내고 싶은데...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집 언덕 한쪽에 부드러운 풀을 낫으로 베어다 놓고 싶습니다. 제발 텃밭에 오지 말고 내가 뜯어다 놓은 풀 먹어라고. 그렇게만 한다면 고라니망 치지 않겠는데...

‘고라니야, 어떻게 우리 서로 너도 좋고 나도 좋은 협정 맺지 않으련?’


*. 텃밭이 뻥 뚫려 한눈에 들어올 때보다 고라니 막느라 울타리 만들어 그물 쳐놓으니 꽉 막힌 듯하여 보기에도 안 좋습니다. 정말 고라니 대표와 마주앉아 풀 이틀에 한 번씩 제공할 테니 텃밭 침범하지 말자는 협정 맺고 싶습니다.

다른 농가에서도 고라니 피해가 얼마나 심한지 저 그물 상품 이름이 '고라니망'입니다. 고라니가 대가리로 밀면 찢어질 정도로 얇은데, 그렇게 하진 않는다 하니... 아 잡초와의 전쟁에 이어 고라니와의 전쟁이 시작돼 참 마음 무겁습니다.


*. 오늘 글은 예전에 올렸는데, 내용을 보강하여 다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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