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147)
Ⅰ. 들어가며
어느 날 무심코 TV 리모컨을 돌리다 한 예능프로그램을 보는데 '김혜수, 5개 국어 구사 연예인'이란 제목을 봤다. 설마 하는 마음에 다른 데 돌리려다 다시 보니 내가 아는 배우 김혜수가 맞았다. 그녀가 영어ㆍ 일본어ㆍ 스페인어ㆍ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뇌섹녀’라니?
처음엔 어리둥절, 다음엔 놀라움, 그리고 부러움으로 이어졌다. 부끄럽게도 아직 해외여행 가면 써먹을 외국어가 하나도 없다. 고교 때부터 영어는 젬병, 대학교 들어가 교양과목으로 제2외국어를 독일어로 선택했는데 ‘아 베 체 데’만 읊조리다 끝.
그때부터였다. 외국어 울림증이 가슴에 배어들어 외국 사람 만나면 입부터 얼어붙으니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자리를 피한다. 일본어 배운다고 덤벼든 적도 여러 번. 투자한 시간만 해도 제법 되리라. 허나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해 일본 가도 버벅거리다가 끝. 그러니 5개 국어 구사한다니 얼마나 대단한가. 그래서 섹시함으로 저장된 그녀의 이미지는 이내 아주 지적인 연예인으로 바뀌었다.
Ⅱ. 배워야 할 짐승의 언어들
(1) 고구마 캐다 고라니를 떠올리다
지난 토요일 고구마를 한 이랑 캤다. 기대보다 적게 나왔다. 예년 같으면 한 이랑에 세 상자는 족히 나왔는데 두 상자 딸막하다. 그나마 나온 고구마 가운데 두더지 입댄 것도 많고. 눈앞에 없는 녀석을 향해 한바탕 욕을 퍼부었지만 이미 끝난 일.
고구마 캐고 나면 할 일이 남는다. 바로 줄기와 잎 처리. 전에는 이웃에 소 키우는 집이 있어 연락하면 기쁘게 가져간다. 소들이 그리도 좋아한다나. 허나 이제 소 키우는 집이 없으니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 양이 적으면 적당히 한 곳으로 몰아놓으면 되나 치우기 만만치 않은 양이다.
문득 고라니가 생각났다. 고구마 줄기와 잎은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 아닌가. 이럴 때 와서 먹어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만약 고라니 언어를 익혔다면 이리 전했을 텐데. 고구마 자랄 때 와 제발 뜯어먹지 말고 이럴 때 와서 먹으라고.
아니 말로써 안 된다면 문서로 남겨도 된다.
- 계약서 -
위치 : 경주시 양남면 OO리 90번지
계약 내용 : 집 주인 목우 씨(갑)는 고라니(을)가 고구마 성장 시 잎과 줄기 먹지 않는다면 고라니(을)에게 고구마 캐고 난 뒤 나오는 전량을 다 주기로 약속함
단, 이를 위반 시엔 갑은 을에게 한겨울에도 먹을 수 있는 신선한 야채를 공급하기로 함.
2023년 9월 26일
(2) 마을 한 바퀴 돌다 꿩의 사랑을 훼방 놓다
산골마을에 살면 고라니 언어만 해결된다고 하여 만족한 생활하기 어렵다. 동물이 어디 고라니뿐인가? 마을 한 바퀴 돌 때마다 산길 오르는 길섶에서 마주치는 꿩들과도 계약을 체결할 필요가 있다.
꼭 거기쯤 이르면 갑자기 ‘퍼드덕’ 또는 ‘쿨렁쿨렁’ 하는 소리를 내며 꿩 두 마리가 날아오른다. 봄에서 가을까진 거의 예외 없다. 덩치가 커도 힘차게 나는 꼬리가 예쁜 녀석은 장끼요, 작달막한 몸집이건만 마치 숨이 차는 듯 된소리 내며 나는 녀석은 까투리다.
두 녀석이 거기서 나오는 까닭은 뻔하다. 종족번식을 위한 짝짓기, 즉 사랑 나누기에 한창이다가 사람이 오니까 다급하게 날아오르는 뽄새다. 그 장소에 이를 때마다 미리 대비를 하건만 두 녀석이 갑자기 날아오를 때는 괜히 놀라고 미안하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꿩의 언어를 안다면 이리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목우 : 야 이 녀석들아! 사람 다니는 길가 말고 좀 더 안쪽에 들어가 사랑 나누면 안 되나? 꼭 길가에서 그런 짓 해야겠니?
그러면 꿩은 이리 답할지 모르겠다.
장끼 : 아 아저씨가 우리 사랑 나누는 시간을 피해 다니면 되잖아요. 꼭 우리가 거사 치를 때마다 다니더라. 일부러 훼방 놓으려는 사람처럼.
(3) 검은 개 ‘연탄’에게 알림
고라니와 꿩에 이어 또 계약을 체결해야 할 짐승이 있다. 아랫길로 내려가다 보면 'OO펜션'이 나오는데 거기 키우는 검은 개. 원래 이름을 몰라 주인이 알면 뭐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냥 임의로 ‘연탄’이라 붙였다. 까맣다고.
녀석은 펜션이 산속에 있다 보니 밤새 짐승이 자주 내려오는가 보다. 그러니 우리가 마을길 도는 아침에는 늘 꾸벅꾸벅 존다. 아예 깊이 잠들었으면 발소리 죽이고 지나가련만 작은 나뭇잎 하나 밟아도 이내 잠을 깬다. 그때부터 맹렬하게 짓는다.
우리를 자주 보아 깨 있는 상태라면 짖어도 반가움의 소리를 낼 텐데 사납게 짖는 건 아무래도 강제로 잠 깬 몽롱한 상태이기 때문이리라. ‘연탄’ 입장에선 밤새 시달려 한창 졸리는데 사람 발자국 소리 들리면 깨어나야 하니 신경질 나리라.
또 밤샘하며 보초 섰다고 줄창 잠만 잘 수도 없다. 낮에도 녀석의 임무는 사람 지나가면 주인에게 알려야 하니까. 그래서 자더라도 아주 얕게 잔다. 좀 안쓰럽지만 내가 도와줄 부분이 없다. 그나마 개의 언어를 익혔다면 연탄의 집 앞에 펼침막을 하나 걸어두련만.
“연탄이 낮에 잠을 자니, 지나치는 동물은 발자국 소릴 죽이시기를.”
(4) 마지막 배워야할 길고양이 언어
마지막으로 짐승의 언어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면 길고양이 언어다.
우리 집엔 길고양이가 드나든다. 녀석들이 드나듦으로써 이득도 생긴다. 들쥐가 없어지니까 그것만도 어딘가. 처음에는 길고양이와 우리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안 가 둘은 서로를 배척하는 사이가 되었다.
녀석이 오디 털려고 깔아놓은 그물 위나 깨끗이 깎아놓은 잔디밭에 무시로 똥을 싸고... 숨겨져 잘 보이지 않는 처마 밑에 박새가 알을 낳아 자라는 재미 보는 게 짭짤했는데 언제 올라갔는지 집을 박살내고 박새들과 알을 다...
그러다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내가 창고 문을 열다가 갑자기 뛰쳐나온 녀석에게 놀라 넘어져 크게 다칠 뻔한 일도 생겨났으니. 그때 아내 비명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그 뒤로 녀석이 나타나는 족족 쫓아내기에 바빴다. 해도 녀석의 행패는 끝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런 관계로 지내선 안 되겠다 싶어 친교 맺기 위한 시도를 하였다. 즉 먹이를 수시로 공급하기. 이렇게 해서 길고양이와 척 지고 사는 관계는 끝나는가 싶었는데 문제는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무한정 늘어나면서 먹이 공급을 끊어야 했다.
다시 녀석들은 아무 데나 똥을 싸기 시작했다. 가장 두려워하는 테라스 위에 똥 싸기. 거기도 씻으면 되나 한동안 냄새가 배어 고개를 쩔레쩔레. 어떤 땐 미워 죽이고 싶다가도 한편으론 걔들 처지를 헤아리면 약해진다. 그래서 이제 다시 녀석들의 언어를 배워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싶다.
계약 내용 : 목우 씨(갑) 집 주변 20m 이내에 사는 고양이(을)와 인간 사이에 아래와 같이 약속한다.
1. ‘갑’은 ‘을’에게 일정한 시기마다 일용할 양식을 제공한다.
2. ‘을’은 ‘갑’의 땅에 똥을 싸지 않는다.
3. ‘갑’은 양남 바닷가에서 낚시로 잡은 생선을 ‘갑’이 먹지 않고 ‘을’에게 준다.
4. ‘을’은 수시로 밭을 드나들며 들쥐를 잡거나 오지 못하도록 만든다.
Ⅲ. 마무리
김혜수를 외모만 번듯한 연예인으로 생각하다 5개 국어를 한다는 소식에 눈이 번쩍 뜨인 것처럼 외국어 잘하는 사람이 그리도 부럽다. 그렇다고 다시 외국어를 배워야 하겠는데 솔직히 자신 없다. 게다가 배운들 해외 나가지 않으면 쓸모가 없고, 나가더라도 패키지라면 꼭 몰라도 된다.
허나 인간의 언어는 몰라도 되련만 산골마을에 살려면 짐승의 언어는 꼭 필요하다. 필수과목이다. ‘청담어학원’, ‘AVALON English’, ‘정상어학원’ 등 유명어학원처럼 짐승의 언어를 가르치는 학원이 근처 있으면 지금 바로 등록하련만.
아, 사람의 언어든 짐승의 언어든, 새로운 언어 익히는 길은 언제나 힘들다.
*. 오늘 글은 예전에 올렸는데, 내용을 보강하여 다시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