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148)
요즘 마을 한 바퀴 돌 때마다 고개를 숙였다 들였다 합니다. 잘 익어 땅에 떨어진 과일을 줍기 위함이지요. 주로 밤을 주우려는 목적이지만 길가에 떨어진 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니 많은데 제가 주울 밤은 적습니다. 그것도 아주 적습니다.
왜냐면 그 길을 저만 걷지 않기 때문에. 예를 들어 아무나 차를 몰고 가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면 밤송이 떨어진 걸 보고 무조건 차부터 세웁니다. 게다가 우리 부부처럼 운동 삼아 마을 한 바퀴 도는 사람도 있으니 기대를 거의 안 합니다. 운 좋게 열 개 남짓 주우면 기분 터지는 날이고.
밤 줍기가 힘드니 도토리 줍기로 바꿨습니다. 도토리는 그리 선호하는 열매가 아니라서 그런지 아침마다 조금씩 주우면 두 됫박은 나올 듯. 밤과 도토리는 나중에 구워 먹거나 묵 만들기 위해 줍는다면, 요즘 길에 떨어진 열매를 주워 바로 먹는 과일도 있습니다. 대추입니다.
원래 대추는 바로 따서 먹기엔 그리 맛난 과일이 아니었는데, 식물 육종학자들의 연구로 이제 굵고도 맛있는 대추가 나왔습니다. 물론 아직도 시골길 걷다 길가로 내민 나뭇가지에 달린 자그마한 대추를 따먹으면 그저 그런 맛이지만 굵은 대추라면 일단 맛이 다릅니다.
아주 오래전 제사가 우리 민족의 풍속으로 굳혀지면서 집집마다 대추나무를 심었는데 제상에 올리기 위한 제물로 쓰려 심었을 뿐 먹으려 심지는 않았습니다. 맛이 별로여서. 아시다시피 대추는 제수용 과일 가운데 으뜸 아닌가요. 조율이시 (대추 ‘棗’, 밤 ‘栗’, 배 ‘梨’, 감 ‘枾’)라 할 때 가장 첫자리를 차지하니까요.
그럼 왜 대추가 제사 지내는 상에도 결혼식 폐백 드릴 때도 으뜸 과일이 되었을까요? 여러 이론 가운데서도 매년 열매가 풍성하게 많이 달리므로 자손 번창을 기원하는 다산(多産)의 의미가 담겨서라는 학설이 지배적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대추가 제상이나 폐백 드릴 시 으뜸 과일이 됨은 운이 좋아서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제수 과일이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을 갖춰야 했는데, 상징적 의미를 지닐 것과 말려두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을 것.
('棗栗梨枾' 가운데 '梨'에 해당하는 '배'는 건조시켜 먹는 과일 아니라서 어떤 계절엔 못 구하니 가끔 빼버리고 '조율시'로만 부르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인 듯)
아마 지금 같으면 대추는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대추보다 더 풍성하게 달리는 열매도 있고, 건조시킬 수 있으며 맛도 훨씬 뛰어난 과일도 여럿 있기에. 그렇게 익은 대추를 보고도 일부러 손 벌려 따먹지 않던, 오직 제수로만 쓰이던 대추가 이제 맛으로도 승부를 걸기 위해 나왔습니다.
10년 이내 알 굵은 개량대추를 먹어 본 사람은 아시겠지만 살구ㆍ 자두ㆍ 복숭아ㆍ 사과ㆍ 산딸기처럼 그냥 따먹어도 참 맛있습니다. 게다가 면역력 강화, 해독작용, 신장 기능 강화 등 건강에도 좋으니 대추가 날개까지 달았다고 해야 할까요. 특히 대추가 대부분의 한약재에 다 들어간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으나 최근 대추씨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진정제를 만들게 되었다는 기사도 나왔습니다.
이쯤에서 ‘대추'로 유명한 황희 정승의 시조를 지나칠 수 없겠지요.
“대조 볼 불근 골에 밤은 어이 뜻드리며
벼 벤 그루에 게는 어이 나리는고
술 익자 체 장사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대추 볼 붉게 익어가는 골짜기에 밤은 어찌 떨어지며,
벼 베어낸 (빈) 그루터기에 게는 어찌 나다니는고.
술 익자 (때마침) 체장사가 지나가니 걸러서 아니 먹고 어찌하겠는가.”
*. 한자어 '대조(大棗)'가 음운변화를 거쳐 '대추'가 되었으니, 이리 보면 대추는 순수우리말이 아닌 귀화어
황희 정승은 조선 전기 명재상으로 소문났습니다. 워낙 이름나다 보니 일화도 부지기수. 그 가운데 하나가 ‘검은소 누렁소’ 이야기입니다. 황희가 젊은 시절 시골길을 가는데 누렁소와 검은소가 일하고 있기에 농부에게 어떤 소가 일을 잘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귀엣말로 누렁소가 일을 잘하는데 검은소가 들으면 서운해하니 말을 조심해야 한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는 미물조차 제 험담하는 소리는 알아듣는다고 두려워한 농부의 마음가짐을 한평생 실천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청백리로 이름을 남겼다 합니다.
위 시조는 가난하지만 풍류를 즐긴 황희의 성품 한 면을 잘 보여줍니다. 대추와 밤이 익어가는 골짜기에 벼 다 베고 난 논을 보니 게가 나다닙니다. 그때 마침 술 거를 때 쓰는 체를 파는 장사가 지나가니 사서 술 한 잔 하고 싶습니다. 마침 안주로 좋은 게가 버글버글 하니까요.
원래 추석 무렵이 대추가 한창인데, 이번 추석은 다른 때보다 조금 늦어 대추도 다 떨어져 갑니다. 그래도 내일 아침 ‘마을 한 바퀴 길’에 땅에 대추가 보이면 주워 먹으렵니다. 나무에 달린 대추보다 떨어진 대추가 훨씬 더 맛있으니까요.
*. 오늘 글은 예전에 올렸는데 내용을 보강하여 다시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