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작년 늦가을에 쓴 일기에서 뽑았습니다.
* 홀대받는 식물 이름의 반전 *
- 호박, 모과, 뚱딴지 -
어제 텃밭 언덕 위 잡초 제거하러 올라갔다. 거긴 예초기 돌리기가 상그러워 다른 곳보다 풀 베는 횟수가 적다. 그 말은 풀이 많다는 얘기다. 잡초가 많으면 더 자주 가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가기가 싫다. 일단 풀이 길어 (소형) 예초기가 잘 통하지 않기 때문이지만.
올라갔더니 역시 엉망진창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하나 하고 한숨을 내쉬는데 저만큼 호박꽃이 보였다.
‘아니 호박꽃이?’
두 번에 걸친 태풍으로 텃밭의 농작물 지지대가 넘어져 그걸 치우는 김에 호박넝쿨, 여주넝쿨, 오이넝쿨 다 걷었기에 관심 밖의 일이었는데...
멀리서 보이는 호박꽃이 하도 고와 보려고 가니 그보다 더 이쁜 누런 호박이 바닥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닌가. 노란 호박꽃과 누런 호박. 가끔 텃밭에서 이 둘을 보는데 그때마다 둘의 어울림은 참 환상적이다. 아니 황홀하기까지 하다.
호박꽃과 호박을 보다가 문득 어릴 때 자라던 동네에서 소꿉놀이 하던 여자애가 떠올랐다. 나보다 두 살이나 어렸고 참 착하고 게다가 이뻤다. 걔의 이름은 박호순. 당시 “호순아!” 하고 부르면 듣기 그리 나쁘지 않다. 그런데 걔는 그 이름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냥 ‘호순아!’ 하고 부르면 되는데 짓궂은 사내애들은 꼭 성과 이름을 붙여 거꾸로 불렀다. 그러면 ‘순호박’ 이렇게 부르는 걸 너무나 싫어했다. 그걸 모르고 무심코 걔에게 남들 부르는 대로 순호박 했다가 가지고 있던 소꿉을 던지는 바람에 이마에 맞았다. 나는 화가 나 걔를 때렸고. 그 뒤로 걔와의 사이는 끝났다.
당시 호박꽃도 꽃이냐 하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호박은 '못 생겼다'는 표현을 대신하는 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인데, 왜 그때는 호박을 못 생김의 대명사로 여겼을까? 그 말을 처음 쓴 사람이 호박꽃을 찬찬히 살펴보았다면 그런 표현을 절대 만들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호박꽃은 이쁘고 누렇게 잘 익은 호박도 절로 오랫동안 눈길을 끌게 하는데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홀대받는 이름이 되었다. 이 호박과 마찬가지로 억울한 대접을 받는 과일이 있으니 바로 ‘모과’다. 경상도에선 모과라 하지 않고 다들 ‘모개’라 한다.
이 모개도 여자의 못 생김을 표현할 때 쓰였다. 서부경남에서 주로 쓰는데 ‘얼굴이 모개겉이 생기가꼬’ 하면 굉장히 못 생겼다는 뜻이다. 그런데 혹 요즘의 모과를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우뚱하리라. 다른 과일 누를 정도로 이쁘진 않아도 푸대접받을 만큼 못 생기지 않았으니까.
그럼 모과의 꽃이 이쁘지 않은가? 아니다. 분홍색에다 아담하고 동글동글하게 생긴 꽃잎을 보면 못 생겼다완 거리가 멀다. 어떻게 보면 무궁화꽃과 비슷하고 또 어떻게 보면 '후 요우' 꽃과 비슷하다. 즉 객관적으로 봐도 아름다운 꽃이라는 말이다.
혹 모과나무 열매가 못 생겨서? 요즘 전통시장에 들르면 좌판에 모과 몇 개 갖다 파는 할머니를 볼 수 있으리라. 할머니가 갖고 나온 모과는 향기는 말할 것도 없고 결코 못 생기지도 않았다. 반들반들 윤기 나는 걸 손에 쥐고 싶을 정도로.
사실 우리 집에도 모과나무가 있고 모과가 열리고 있지만, 지금의 모과 아닌 아주 예전의 모과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어쩜 고개를 끄덕이리라. 그때의 모과는 울퉁불퉁 참 못 생겼다. 나는 어릴 때 보았기에 그 말에 수긍을 한다. ‘그 집 딸아 우찌 시집갈꼬. 얼굴이 모개겉이 생기가꼬’ 이 표현에 반쯤 동의한다.
억울한 대접을 받고 있는 이름이 또 있다. 바로 '뚱딴지'다. 지금은 뚱딴지보다 돼지감자로 더 알려졌지만. 그 뜻은 우둔하고 무뚝뚝한 사람을 비웃어 이를 때 쓰는 말이다. 다행히(?) 돼지감자란 이름으로 쓰여 그나마 다행이랄까.
돼지감자라 불러도 이름 자체에서 감자보다 돼지가 우선 떠오르니 이쁨보다 ‘못 생김’으로 퍼뜩 연결되리라. 정말로 돼지감자는 못 생겼다. 여기저기 튀어나온 눈으로 하여 울퉁불퉁 자유방임주의자처럼 생겼다. 앞의 모개와 다를 바 없이.
분명 외모만으로는 감자랑 비교할 게 못 된다, 그보다 훨씬 격 떨어지니. 더욱 요즘 감자는 미끈하게 잘 빠진 형태로 개량돼 얼마나 보기 좋은가. 헌데 돼지감자만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아마도 육종학자의 손에 전문적으로 환골탈태하지 않는 한 못 생겼다는 평가를 벗어나기 어려울 듯.
그런데 돼지감자만 보다가 그 꽃, 즉 돼지감자꽃을 보면 달라진다. 지금 우리 텃밭 귀퉁이에 머리를 내민 꽃을 보노라면 해바라기 못지않다. 아니 내 눈에는 노란빛이 더 선명해 이뻐 보인다. 만약 빈센트 반 고흐가 우리나라 와서 돼지감자꽃을 보았더라면 해바라기 대신 그림 소재로 쓰지 않았을까 하고.
풀 가운데는 이름 때문에 홀대받는 종자가 더러 있다. 대표적으로 개불알풀, 며느리밑씻개, 방가지똥, 쥐오줌풀, 개망초꽃... 이름이 나쁘면 확실히 관심을 덜 받게 된다. 거꾸로 이름이 예쁘면 한 번 더 눈길을 끎도 사실이다.
시인 가운데 예쁜 이름을 가진 이로 ‘정끝별’ 시인을 첫 손으로 꼽는다. 시인의 아버지가 ‘끝내는 별이 되어라’란 뜻으로 지어주었다나. 이름 덕분인지 이화여대 교수에다 우리나라 최고 권위의 '소월시문학상'을 받았다. (물론 이름과 상관없다는 거야 다 알지만)
다시 어릴 때 살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
그 뒤 그 소녀의 소식은 모른다. 그때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오빠!” “오빠!” 하며 부르던 그 소녀. 부산시 연지동 럭키회사(현 LG그룹의 모태가 되는 회사) 뒤 산동네에서 ‘너는 엄마, 나는 아빠’ 하며 소꿉놀이 하며 지내던 그 소녀.
어쩌면 개명했을지 모른다. 삼십여 년 전만 했어도 그녀를 만난다면 좋은 이름을 지어주려고 했는데... 채린, 솔유, 윤슬 등 여러 이름을 지어놓았는데... 어쩌면 아직도 본디 이름으로 살지 모르겠다.
혹 주변에 그 이름으로 사시는 올해 67세의 여인을 아시는 분 계시면 이 글 쓴 사람이 무척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