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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r 25. 2023

제109화 : 헛되고 헛되도다!

       * 헛되고 헛되도다! *



  며칠 동안 마당 한가운데 놓인 정자(亭子)와 씨름했습니다. 이는 사흘 동안 막노동을 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정자를 15m 정도 앞쪽으로 옮기는 일을 했습니다. 물론 옮기기야 지게차가 했지만 준비부터 뒷일을 제가 다 했으니까요.
  위치 좋은 곳에 잘 자리 잡아 마을을 훤히 내려다보는 정자를 왜 옮기려 했냐고 물으신다면 바로 ‘농지 원부 신청’ 때문입니다.


(밭 한가운데 자리한 원래 정자)



  시골에선 ‘농협 조합원’이 되면 편리합니다. 자기가 가입한 만큼 출자배당금을 받고, 농협에서 파는 비료, 농약, 농기구 등을 싸게 사는 등. 그러나 시골 산다고 하여 누구나 다 조합원이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논이든 밭이든 아니면 과수원이든 300평 이상 소유해야 합니다.
  우리 집은 시골집치곤 땅이 넓으나 불행히도 밭이 300평 되지 않아 자격 안 돼 조합원이 되지 못했습니다. (‘대지’는 포함되지 않음) 그래서 그동안 포기하고 있었는데 올해부터 100평만 넘으면 농협 조합원은 될 수 없으나 ‘농지 원부' 신청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농협 조합원이 아니더라도 농지 원부만 있으면 땅을 사고팔 때 취득세와 양도소득세 감면, 농기구 구매 지원 등 이점이 많다 합니다. 헌데 문제는 신청만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 농지로서의 요건을 갖추었나 하는 점을 따지게 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농지(논, 밭, 과수원) 위에 '농막'이나 '정자' 같은 가건물이 있어도 되나 반드시 이동 가능해야 합니다. 즉 움직일 수 없게 고정돼 있으면 농지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결국 농지 원부 신청이 불허됩니다.


(정자를 뽕나무 앞쪽으로 옮김)



  과거에는 이런 자격을 신청할 때 서류만 내면 되었는데, 이젠 면사무소 직원이 반드시 임장하여 확인합니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신청만 하면 농지 원부가 나오나 했더니 며칠 뒤 담당직원이 나와 마당 가운데 선 정자를 보고 안 된다고 했습니다.
  정자가 태풍이나 폭우에 버티도록 콘크리트 구조물에다 정자 기둥을 박은 형태였으니까요. 다시 말하면 이동할 수 없게 만들어놓았습니다. 이를 이동 가능하게 만들든지 아니면 농지 아닌 대지로 옮겨야 합니다. 4~5 톤은 족히 무게 나갈 정자를 다루는 일이라 대충 해선 안 됩니다.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알겠지만 우리 집 정자는 쇠 각관(사각으로 된 쇠기둥)에 방부목을 덧댄 형태입니다 이를 옮기려면 우선 그라인더로 각관을 잘라야 합니다. 문제는 제대로 잘라야지 수평이 맞아 옮겨도 기울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옮길 자리에 적당한 크기의 콘크리트 구조물(이하 줄여 '콘구')을 만들고 그 위에 ‘베이스’란 이름의 작은 철판을 놓은 뒤 ‘앵커 볼트’를 박아야 합니다. 그런 뒤 지게차가 정자를 옮겨 베이스에 놓으면 용접하여 붙입니다.

  이렇게 글로 적으면 참 쉬운데 실제로 하면 초보자에겐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옮긴 정자가 작은 콘구 안에 제대로 들어가야 하며, 들어갔다 하더라도 기울지 않도록 수평을 잡아야 합니다.


(작은 철판을 베이스, 가장자리 튀어나온 네 개가 앵커 볼트)



  옮길 자리에 콘구 설치 때까진 이상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게차가 정자를 들고 와 그 위에 놓으려 했을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 번도 두 번도 아닌 열 번이나 넘게 줄자로 재어 콘구를 깔았건만 콘구들 사이가 너무 벌어져 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땅 파고 콘구를 제 자리에 놓는 작업은 단 시간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지게차 대여비 15만 원만 날리고 말았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도와주려 온 이웃 후배에게 얼마나 부끄러운지...
  어떻게 그런 실수를 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줄자로 재었건만... 문제는 거리가 똑같은 길이로 어긋났다는 점입니다. 뭔가에 씌어도 단단히 씌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각관을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놓음)



  성경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란 구절이 나옵니다. 이 말이 떠오름은 며칠 동안의 수고가 다 헛되고 헛된 일이 되고 말았으니까요. 절로 ‘헛되고, 헛되도다!’가 터져 나왔습니다. 힘도 더 들고 돈도 더 들고 시간도 더 들었으니까요.
  처음에 제대로 ‘자질(자를 재는 일)’ 했더라면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자탄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을 텐데... 저녁 내내 머리를 감싸다가, 머리를 쥐어박다가, 머리를 흔들다가, 머리를 수건으로 덮었다가 해도 쉬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콘구를 옮기는 작업을 다시 했습니다. 예전에 한 번 해봤던지라 그리 힘들진 않아 금방 끝내고 다시 지게차를 불렀습니다. 이번엔 제대로 잰 덕분에 정자가 제 위치를 잡아 우뚝 섰습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바로 그 위치입니다.
  그런데 옮기고 나니 참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제까지 ‘헛되고 헛되도다!’ 한 자탄의 생각이 쑥 들어가고 그 자리에 뿌듯함이 채워진 게 아니겠습니까. 정자 옮김으로써 지게차 두 번 대여비 30만 원이 들었고, 힘이 들어 팔다리는 물론 어깨까지 뻐근한데 얻은 점도 보였기 때문입니다.


(정자 올라가는 계단도 놓고 전선도 매립함)



  마당에 들어서면 막힌 느낌이지만 밭 쪽을 내다보면 막히는 게 없이 툭 트여 밭이 엄청 넓어 보였습니다. 또 전에는 사실 정자가 있어도 거기 앉아 쉴 경우는 적었습니다. 밭 한가운데 떨어져 있어 휑뎅그렁한 느낌을 주었다고 할까요.
  게다가 건물 가까이로 옮겨놓으니 와이파이가 터져 정자 안에서도 볼일(노트북이나 휴대폰 사용)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소득은 다음에 만약 이와 비슷한 일을 할 때가 오면 시행착오를 거쳐 바로잡았으니 비슷한 실수는 하지 않으리라는 점입니다.

  ‘헛되고 헛되도다!’에서 ‘얻고 또 얻다!’로 바뀜이 얼마나 기쁜지. 단지 생각 하나 바꿈으로 얼마나 마음의 평화를 얻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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