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그리운 아버지(8)

제8화 : 아버지의 여섯 번째 직업 '부전시장 공중화장실 관리'

* 아버지의 여섯 번째 직업 '부전시장 공중화장실 관리' *



자식이 부모를 닮는 건 당연하리라. 내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형질 중에 자랑할 게 두 가지 있다. 바로 머리카락과 이()이다. 머리카락은 칠십 다 됐는데도 새치가 거의 없고 숱도 많다. 친구들 대부분은 염색을 하거나 벗겨져 있는 터라 내 머리카락이 아직 검은 머리칼 그대로라고 하면 놀란다.

나는 머리카락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단단한 이(엄마의 이는 좋지 않았기에 이만큼은 아버지의 우성형질을 물려받았음이 분명하다)를 더 고맙게 여긴다. 스물여덟 개 중 아직 상하거나 벌레 먹은 게 거의 없이 단단하다. 아버지도 일흔두 살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상한 이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늘 엄마 하는 말이 “니 아부지는 생쌀밥은 묵어도, 죽밥은 못 묵는다캤다 아이가.”였다. 밥은 물론 반찬 중에 단단한 거나 씹히는 게 없으면 젓가락이 한참 상 위를 맴돈다.

이가 단단하다 보니 한 가지 얻은 식습관이 이틀에 한 번 꼴로 생선회를 먹는 거였다. 생선회도 뼈를 바른 것보다 뼈 있는 상태를 더 좋아했다. 이 세상 소풍 끝내고 돌아가는 날 아침에도 뼈를 오도독 씹어야 제대로 맛을 느끼는 개상어에 젓가락을 올렸다 하니….


 아마 지금처럼 생선회가 비싼 시절이라면 그런 호사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나 그때는 수산물시장에 가면 버리다시피 하는 싼 생선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생선회에 하루 건너 젓가락을 올려야 하면서 집에서 가까운 부전시장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거기 한 어물전에서 일을 도와주고 고기를 얻어 왔던 것 같다. 그리고 시장을 부지런히 드나들면서 얻은 직업이 바로 시장에 딸린 공중화장실 관리였다.




집에서 걸어 20분쯤 되는 거리를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 그때도 아버지의 자전거는 새것이 아니라 중고였다. 매일매일 손보지 않으면 몰고 다니기 힘든.

그 무렵의 나는 중학생이라 스스로 자전거 탈 능력이 있었으나 아버지의 자전거를 탈 수 없었다. 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아, 딱 한 번 아버지의 자전거를 탈 기회를 가졌다.


아버지가 사촌형 결혼식에 참석하러 시골로 갔을 때였다. 내가 자전거를 몰고 나가는데 어머니가 “난중에 니 아부지한테 들키면 맞아죽는다캐도.” 하는 두 번의 경고를 한 귀로 흘리며 신나게 타고 다녔다.

그런데… 적어도 시골 가면 이틀 이상은 머물다 오는 걸로 알고 신나게 즐겼는데 예상보다 일찍 돌아온 아버지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그날 얼마나 혼났는지는 오래전의 일이라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여기까지 …’ 하는 식으로 금을 그어놓고 그 금을 넘으면 그냥 두지 않았으니 된통 경을 치렀을 게다.



아버지가 부전시장 공중화장실에서 한 일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용자들에게 돈을 걷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청소. 그때 한 사람이 한 번에 내는 돈이 얼마였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다만 그렇게 모은 돈으로 아버지처럼 청소하는 이에게 월급을 주고, 또 분뇨수거차가 와서 처리하는 비용을 감당할 정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드나드는 사람들이 던지는 동전이 돈통에 떨어지면서 내는 소리는 화음이 제대로 맞지 않는 교향악과 같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와 던질 때는 바로 통에만 맞고 떨어지는 소리 ‘텅’만이거나, 통에 맞고 다시 튕겨 다른 동전에 맞으면 ‘텅!’ ‘쨍!’ 하는 연속된 소리가 났다. 그러나 여럿이 밀려들면서 나는 소리는 화음이 뒤죽박죽이 된다. ‘텅 쨍!’, ‘쨍 텅!’, ‘텅 쨍 텅!’, ‘쨍 텅 쨍!’ 하고.


사람들이 뜸해질 무렵이면 아버지는 청소를 했다. 학창 시절에 가장 무섭고 귀찮던 청소가 화장실 청소 아니었던가. 잘못을 저지른 벌로 청소하는 곳이 화장실이었고, 범법자(?)가 생기지 않을 때는 청소 맡은 아이들이 죽을상을 하고 가야 할 곳이었고.

한 손으로 코를 막고 다른 한 손의 고무관으로 물을 내뿜으면 다음 아이는 역시 한 손으로는 코를 막은 채 다른 한 손으로 비질을 한다. 그러나 순탄한 경우에야 코 막고, 물 쏘고, 비질로 끝나지만 막혔을 때는 정말 난감하다. ‘뚫어 펑’으로 뚫리지 않을 때는 진짜 죽을 맛이고.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청소할 때를 보면 아이들과는 달리 손으로 코를 막는 대신 마스크를 했을 뿐 다른 과정은 똑같았다. 긴 고무관으로 변기를 향해 물을 쏜 뒤 비질이었다. 더러운 건 둘째치고 고약한 냄새 때문에 하루에도 몇 차례 거듭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리라.

학교 갈 때면 아버지의 자전거는 대문 옆에 서 있었다. 그걸 볼 때마다 ‘일요일엔!’ ‘이번 일요일엔!’ 하고 되뇌었다. 아버지는 점심을 시장통에서 사 먹어도 되련만 꼭꼭 집에 들렀다. 아마도 점심값조차 아끼려는 마음에서였을 게다.


그런데 일요일만은 내가 도시락을 갖다 드렸다. 그렇게 하라고 누가 시킨 건 아니지만 그 일만은 자청했다. 도시락을 드는 그 잠깐이나마 자전거를 마음껏 탈 수 있었기에.

자전거를 몰고 나가면 우선 시장 가운데를 지난다. 그런 뒤 하야리아부대(부산 중심가를 차지했던 미군부대) 쪽으로 간다. 이 부대를 다 돌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리니 다 돌지 못하고 시장에서 부대 정문까지 갔다 왔다 한다. 그러면 20분쯤 걸린다.


그렇게 즐기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그날도 시장 안으로 자전거를 조심스럽게 몰다가 사람들이 뜸한 장독가게쯤 왔을 때 속도를 올렸다. 이곳에선 노상 그 정도로 속도를 내던지라 페달에 힘을 주는데 갑자기 샛길에서 급히 나오는 손님을 피하려고 옆으로 핸들을 트는 순간 뭔가에 ‘쾅’ 하고 부딪혔고 그 충격으로 자전거와 함께 쓰러졌다.

아픔보다 더 먼저 반응한 불안감에 떨며 몸을 일으키자 눈에 들어온 건 말 그대로 ‘와장창’이었다. 장독 몇 개가 산산조각이 나 여기저기 흩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사람들이 주위로 몰려들고 누군가의 입에서 “변소 아저씨 아들이다!” 하는 소리에 이어 주인아저씨의 고함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보다 저만큼에서 달려올 아버지를 기다리는 그 순간이 얼마나 무서웠던가. 아버지를 보는 순간 절로 눈이 감겼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 무릎부터 잡았다. “피사 좀 나도 장독쪼가리가 안 박혔은께네 마 괜찮다. 고만하면 다행인기라.” 하며.

그날 밤 아버지는 그 일에 대해서 아무 말 안 했지만 어디서 들었는지 엄마가 화내며 하는 말을 통해 대충의 사건 처리과정을 알게 되었다. 장독 몇 개 깨뜨린 건 아버지가 사과의 말과 함께 보상하기로 해 잘 무마됐다는 것.


하지만 다음날 아침 아버지의 자전거를 보았을 때 또 한 번 공포감을 느껴야 했으니…. 중고자전거가 다시 고쳐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채 대문 옆에 기대 있었다.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학교 갔다가 돌아와 아버지를 기다렸는데, 저녁에 만난 아버지는 “정갱이 마이 아플낀대?” 하는 말 한마디뿐이었다.

너무 뜻밖의 조치에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전에 몰래 자전거 몰다 들켜 호된 경을 친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잖은가. 그때는 아버지가 하지 말라고 금지해 놓았던 걸 했을 뿐이지만 이번에는 장독값 변상과 더불어 자전거를 완전히 망가뜨렸으니 예전보다 더 큰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는데….


지금도 그때 아버지가 한 말과 일 처리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건 당신이 허락하신 일과 허락하지 않은 일에 대한 평가가 달랐지 않을까 하는.

즉 앞의 행동은 당신이 그어놓은 그 금을 넘어섰기에 당연히 내린 체벌이었다면, 장독 사건은 당신이 타라고 허락했기에 그 사안에 대한 처리 방향이 달랐으리라는 것.


아버지는 그날 이후 한동안 자전거 없이 걸어 다녔다. 걸어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얼마 동안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느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잊혔다. 그래서 다시 언제쯤 아버지가 자전거를 몰게 됐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그러나 아들과 딸에게 그러지 못한다. 그런 깨달음을 주지 못한다. 아이들에게 맺고 끊음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간혹 아이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무조건 화부터 내거나 아니면 꼭 지적해야 할 사항임에도 대충 넘어갈 때가 많다.


비록 그때의 아버지처럼 매를 자주 들지 않아 언뜻 자상해 보이지만 또렷하게 깨달음을 주는 교육을 하지 못한다. 깨진 장독을 보는 대신 무릎을 만지면서 자식의 다침을 먼저 걱정하는 그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

그때 아버지의 자전거는 분명히 내게 자식을 가르칠 때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잘 가르쳐주었는데도. 비록 시장에서 돌아오는 자전거에 실려 있는 건 고작해야 고등어 한 손이나 배추 세 포기였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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