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 아버지의 묵묵한 가르침
* 아버지의 묵묵한 가르침 *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정리하다 엄격하신 내용은 잔뜩 늘어놓았는데 자상하신 면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실은 꽤 많았는데도 말이다.
그러니까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서 좋은 기억이 나쁜 기억에 가려져 묻혔던 게 아닌가 싶다. 그 발굴 작업의 하나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남달랐다. 손에 톱과 망치와 끌과 대패만 쥐면 뭐든 뚝딱뚝딱 잘 만들어냈다. 목수 직업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으나 아마 목수로 일했어도 한몫했으리라.
아버지가 만든 작품은 주로 방안에 쓸 도구였다. 마당에 쓸 도구로서는 토끼를 키울 때면 토끼장, 닭을 키울 때면 닭장, 그리고 개집… 방안에 쓸 도구로서는 선반, 살강, 앉은뱅이책상 등이 바로 아버지의 창작물이다.
그런 뛰어난 솜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내가 필요로 하는 물건은 만들어주지 않았다. 그 손재주로 조금만 힘들이면 팽이, 연, 썰매 등을 만들어줄 수 있었으련만 그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동네 형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배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만든 팽이나 연, 썰매는 단단하지도 매끈하지도 않았고, 무척이나 어설펐다. 팽이는 조금 돌다가 한쪽으로 픽 쓰러졌고, 연을 날리면 한쪽으로 기울거나 다른 연과의 싸움에서 판판히 졌다. 썰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얼음과 닿는 부분의 철사가 계속 벗어나 한 번 타고 나면 다시 바로잡아야 쓸 수 있었다.
그 해 겨울, 아이들과 함께 연을 날리고 있었다. 방구연(‘방패연’의 경상도 사투리)을 만들 능력은 없었으나 가오리연 정도는 만들 수 있어, 내가 띄운 가오리연은 하늘로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때 저만치서 방구연이 다가오는 게 아닌가. 다가오는 목적은 뻔했다. 방구연은 손가락의 튕김에 의하여 높은 데서 낮은 데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의 방향과 위치 전환이 자유롭다. 그에 비하여 가오리연은 어렵다. 그걸 이용하여 내 연을 끊어먹으려는 것이다.
달아나려고 애썼지만 내 연은 그예 걸려들었고 이내 잘려 날아가고 말았다. 나는 그냥 땅에 퍼질고 앉았다. 그리고 울었다. 연과 실을 잃어버린 게 억울해서였지만 그보다 연과 연이 부딪칠 때마다 당함에 대한 서러움 때문이랄까. 그날 나는 몰랐는데 우연히 아버지가 거기를 지나가다가 봤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다음날 대나무를 꺾어오더니만 연을 만들었다. 내가 그리도 갖고 싶어 하던 방구연이었다. 크기가 엄청났다. 그만큼 큰 연을 가진 형은 동네에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자새도 평면도 사각도 아닌 팔각자새를 만들어주었다.
아버지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오후에 나를 뒷산으로 데리고 가는 게 아닌가. 딴 설명 없이 묵묵히 가져온 도구를 꺼냈다. 다 쓴 포마드병과 망치, 쑤어온 풀, 실이었다.
먼저 포마드병을 망치로 보드라운 가루가 될 때까지 부수었다. 그런 뒤 풀주머니를 만들어 나더러 한 손으로는 풀주머니를, 다른 한 손으로는 포마드병 가루를 들도록 하곤 당신은 실을 그 위에 놓고 당기셨다.
그러니까 먼저 풀이 묻은 실이 빠져나오면서 가루를 든 손을 지나면 실에 유릿가루가 묻게 된다. 아버지는 그 실을 가지고 가까이 있는 소나무와 멀리 있는 소나무까지 갔다 왔다를 반복했다.
두 시간쯤 지나자 실은 말랐는데 아버지는 시험 삼아 그걸로 댓잎에다 슬쩍 문질렀다. 그러자 금방 댓잎이 잘리는 게 아닌가. 바로 사를 먹인 실이 된 것이다. ‘사를 먹인 실’과 그렇지 않은 실이 부딪친 결과를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내 연은 그날부터 동네의 ‘王연’이 되었다. 크기 면에서도 그렇지만 내 연실과 부딪치면 어느 누구의 연도 온전할 수 없었다. 내가 연을 들고나가면 자기 연을 거둬들이는 아이들이 늘어갔다.
간혹 용기 있게 붙자고 덤비는 애들이 있었지만 두 번만 튕겼다 풀었다 하면 그의 연은 뒷산 너머 사라져 갔다. 어느새 내 연은, 아니 나는 아이들의 주목 대상이 되었다.
아버지는 연을 끝으로 다른 놀이도구는 만들어주지 않았다. 다만 내가 만들 때면 옆에 와서 부품을 갖다 주거나 한 마디 정도만 거들뿐. 예를 들면 썰매를 만들 때 다른 아이들은 나무 밑에 철사를 대었지만 내 썰매에는 ㄱ자 쇠붙이가 붙었다. 철사는 닳으면 잘 나가지 않거나 끊어질 위험이 있지만 ㄱ자 쇠붙이는 잘 닳지도 않고 닳아봐야 그게 그거라 철사보다 훨씬 안정감이 있었다.
그런데 한 마디 거드는 말은 꼭 질문 형태였다. “오래 타면 무릎이 마이 아플낀대?” 한 번 나가면 네댓 시간을 탔으니 무릎뿐이 아니라 온몸이 다 아프다.
그렇다고 하자 아버지는 한 마디 더하셨다. “그럼 궁디를 받칠 수 있도록 맹글면 더 안 낫것나?” 그날 나는 좌석 있는 썰매를 만들었다. 역시 그 썰매는 동네에서 가장 주목받는 썰매가 되었고.
아버지는 그 뒤로 뭘 만들어주는 대신에 질문으로 슬쩍슬쩍 흘려주었다. 뭘 가르쳐 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도 내가 자전거 타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보이자, 어느 날 타작마당으로 데리고 가더니 그냥 타보도록만 했다.
잡아주지 않은 상태에서 몰다 보니 그냥 처박혔다. 그러자 “와 넘어졌노?” 했다. 그래서 볼멘소리로 “자전거가 한쪽으로 기울어졌으니까요.” 하자, “그라몬 와 한쪽으로 기울어지노?” 했다.
나는 또 “몸이 한쪽으로 쏠렸으니까요.” 하자, “그라몬 쏠릴라 칼 때 안 넘어지지 하몬 안 되나? 넘어갈라카몬 반대방향으로 하는 기 좋은가 넘어갈라카 방향이 좋은가 한 번 해 바라.” 그걸 끝으로 아버지는 돌아갔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넘어가려는 반대방향으로 버텨야 넘어지지 않지, 넘어가려는 방향이라면 당연히 넘어질 텐데 왜 저런 말을 했는가 하고. 그래서 혼자 남아 넘어지려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억지로 버텨보았건만 다시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아마 그날 무르팍이 꽤나 벗겨졌을 게다. 그래도 계속 그 방법으로만 하였는데 넘어지는 꼴불견을 면할 수 없었다. 그때 넘어지려는 방향으로도 한 번 해 보라고 한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무수히 넘어지고 다친 뒤에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운 것이다. 솔직히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냥 한 번 시범 삼아 보여주었더라면 다치지도 않았을 텐데… 그랬더라면 아버지가 참 다정한 분으로 기억되었을 텐데.
아버지는 머리로 배우지 말고 몸으로 익힘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었다. 머리로 익힌 기술은 시간이 가면 잊히지만 몸으로 익힌 기술은 쉬 잊히지 않는다. 삼십 년 전에 사라진 아버지의 자전거는 아직도 내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