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그리운 아버지(7)

제6화 : 아버지의 다섯 번째 직업 '만화방' 운영

* 아버지의 다섯 번째 직업 '만화방' 운영 *



나이 든 이로서 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아직도 무협소설을 읽는다. 복잡한 사건으로 머리 썩일 일이 생기거나, 다른 일 하기에는 그렇고 그냥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할 경우에 주로 읽는다. 무협소설로서 보다 무협지로 더 익숙하게 불리는 무협소설!

내 머릿속의 독서기록장에 가장 먼저 올라 있는 책도 무협소설이다. 최초로 무협지를 대한 때는 중학교 1학년으로 기억한다. 무협지가 가장 먼저 저장됨은 아버지의 직업 때문이다. 아버지의 직업이 몇 개였는지 정확히 그 수를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똥 퍼’, ‘물방개 장수’, ‘숯 장수’, ‘만화방’, '연탄 배달부'를 거쳐 ‘공중화장실 청소’까지가 분명히 기억나는 직업들이다.


우리 가족이 세 들어 살던 아랫동네 팔칸집에서 나의 실수가 만들어낸 사건이 큰 파장을 일으키며 산동네로 옮겨간 다음에 아버지가 택한 직업이 구멍가게를 겸한 만화방 운영이었다. 그런데 구멍가게는 우리보다 더 좋은 여건의 자리에 다른 가게가 생김으로써 이내 포기하고 만화방만 독립적으로 운영했다. 아마 산동네 오직 하나뿐인 만화방이었을 게다.

산동네! 나는 달동네란 말보다 산동네란 말을 더 즐겨 쓴다. 달을 가까이 볼 수 있고, 조금은 더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는 데다 낭만적인 뜻을 머금었다는 점에서는 달동네란 표현이 산동네보다 분명히 낫다. 그러나 아래 평지 동네에 살 수 없어 무허가로 산에 올라와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 동네는 달동네가 아니라 산동네일 뿐이다.


아버지는 평소 “사램은 우짜든동 공부해야 하제. 사램이 사램이 아니라 공부해야 사램이 되는기라. 잘 살라꼬 캐도 공부해야 하고, 기죽지 않고 살라꼬 캐도 반다시 공부해야 하능기라.” 하며 무척 공부를 강조했다. 성적표를 읽어낼 능력이 안 돼 이웃집 고등학교 다니는 형의 집에 가 내 성적을 알고는 매를 들었다. 성적이 좋을 때는 가게에 있는 가장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는 기회도 주었고.

아마 그 덕일 게다. 늘 공부를 강조한 그 덕에 이만큼이라도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게. 아직 사람이 됐다고는 자신할 수 없지만, 기죽지 않고 사는 건 다 아버지의 덕이다. 어쩌면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잘 섞어가면서 자식을 공부시켰던 것 같다.


(구글 이미지에서)



만화책만 취급하던 아버지가 무협지까지 갖다 놓게 된 까닭은 전적으로 나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문 앞에도 가지 못했지만 혼자 한글을 익혀 쓰지는 못해도 받침이 아주 복잡한 글자를 제외하곤 읽기가 가능했다. 그러니 당시 인기 만화였던 <의사 까불이>, <삐빠>, <라이파이> 이런 제목을 읽을 수 있어 아이들에게 빌려줄 수 있었고, 또 다음 권을 요청하면 그걸 가져다줄 능력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만화도매상에서 만화책보다 더 돈벌이가 되는 무협지를 권했던가 보다. 아마 솔깃했으리라. 그러나 무협지는 아버지에게 무리였다. 한글 읽어내는 능력이라 해봐야 겨우 만화 제목 읽는데도 상당히 애를 써야 하는 처지에 한자라니…. 그런 어려움 때문에 포기했던 무협지를 내가 중학교 입학하면서부터 꾀를 냈던가 보다.


입학한 사흘쯤 뒤 학교에서 한자를 배우느냐고 해 “예.” 하고 대답하는 순간부터 일은 벌어졌다. 한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배웠으니 쓰는 건 힘들어도 간단한 건 읽을 수 있었다. 해도 고작 중1짜리가 한자를 알아야 얼마나 알까마는 아버지는 내가 아무 한자나 다 읽을 줄 알았는가 보다.

입학한 지 한 달쯤 지났을까, 우리 집 만화방 한 구석에 무협지가 꽂혔다.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무협지 표지의 제목 옆에 한글로 토 다는 일을 해야 했다. 그런데 무협지의 제목은 대부분 중1 실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한자라 모른다고 해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아버지의 기대에 찬 눈-사실은 겁을 주는 눈- 때문에 적지 않을 수 없었다. 하다 안 되면 옥편을 찾아보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알다시피 옥편을 찾는 것도 한자에 대한 교양이 어느 정도 있어야 가능하지 기초 한자도 제대로 못 깨친 중1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무협지는 들어왔고 다시 돌려주면 엄청나게 손해 본다는 아버지의 엄포에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무협지마다 아버지가 읽을 수 있도록 제목에 한글로 토를 달아야 했다. 능력 밖이라 엉터리 제목도 제법 많았다. 하지만 빌려가는 사람들이 거의 다 동네 형들인지라 먼저 지적해 주면 재빨리 바꿨기에 아버지는 그때 아들의 한자 실력을 대견하게 여겼으리라.


(구글 이미지에서)



한자 제목에 한글 토를 달면서 저절로 무협소설을 가까이할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하여 무협지는 내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지금처럼 학교수업 마친 후 방과후학교다, 과외다, 학원이다 하며 공부해야 하는 부담을 못 느끼던 시절이라 집에 오면 방에 처박혀 무협지를 읽었다. 심지어 학교에까지 책을 가져가 쉬는 시간은 물론 수업시간에까지 몰래 읽기도 했다.

아버지는 내가 만화 보는 건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가끔 몰래 만화 읽다가 들키면 크게 혼이 났다. 그 이유를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공부에 전혀 도움 안 된다고 여겼으리라. 그럼에도 무협지 읽는 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제목을 달아주는 일을 했기 때문일까? 아니 그보다는 무협지는 책답다고 여겼던 것 같다. 많은 양의 글과 어려운 한자도 나오기에.


덕분에 당시에 나온 무협지는 대부분 읽게 되었다. 와룡생의 <군협지>, <비룡>, <비연>, <금검지> 등의 수많은 작품과 우리나라 무협소설을 개척한 김광주의 <비호>, <정협지>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사십 년이 다 된 아직도 그 내용 중 일부가 기억에 남아 있는 작품이 있다. 여태껏 와룡생이 지은 작품인 줄 알았는데 반하루상이 지은 <천살성>이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에게 무협지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책이었던 것 같다. 당시 신문에는 한자가 많아 아버지는 읽지 못해선지 유식과 무식의 기준을 신문을 읽느냐 못 읽느냐로 판가름했다. 어디서 들었는지 무협소설이 신문에 연재된다는 걸 듣고는 무협지 읽는 걸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적극 권장했다.


아버지가 당신이 다루는 무협지를 특별한 글로 여기게 되면서 훌륭한 사람에 대한 기준이 달라졌다. 나더러 “니도 이런 책을 쓴 사램맨치로 훌륭한 사램이 대야 하는기라.” 하는 말을 술 한 잔 하는 날은 꼭 했다. 겨우 한글만 근근이 읽을 수 있는 아버지에게 글을 읽는 걸로 끝나지 않고 쓰고,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다는 그것이 대단한 일로 여겨졌으리라.

문득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원작소설 중의 하나인 <칼의 노래>와 자전거로 전국을 여행하며 쓴 기행수필집 <자전거 여행>을 펴낸 김훈이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무협소설가인 아버지 김광주 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 말이 생각난다. 그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나는 소년 시절에 병석에 누운 아버지의 구술을 받아서 무협지 원고를 대필했다. 그것이 내 문장 공부의 입문이었다. 가난은 가히 설화적이었다. 그 원고료로 밥을 먹고 학교도 다녔고 용돈을 타서 술을 마셨다.”


아직 내 이름으로 된 책 고작 한 권 냈을 뿐이지만 글 쓰는 일을 놓지 않고, 그것을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건 다 아버지의 공이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아직 소설을 못 쓰고 있다. 겨우 생활글만 긁적거릴 뿐.

자전거에 무협지를 싣고 울퉁불퉁한 돌계단길을 오를 때 아버지는 당신 아들이 제대로 된 책 한 권은 내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자전거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그런 빚을 느낀다.

이전 06화목우씨의 그리운 아버지(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