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그리운 아버지(6)

제7화 : 아버지의 네 번째 직업

* 아버지의 네 번째 직업 *



아버지의 직업을 하나하나 새겨가며 「그리운 아버지」란 제목으로 글을 연재하고 있는데, 사실 직업의 순서도 그 내용도 정확하다 할 순 없다. 지금부터 50년 더 이전의 일이니까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물론 나 혼자 기억의 태엽을 감았더라면 아버지의 직업 일일이 떠올리는 일을 감히 도전 못했으리라.

그나마 글 쓸 정도의 정보는 지금은 안 계시지만 어머니와 현재도 필요해 전화하면 답해주는 세 분 누님들 덕이다. 아버지의 직업을 나열하면서 솜솜히 따져 보니 세 종류로 묶인다. ‘화장실’ 관련 둘과, 숯과 연탄 같은 ‘검은빛’ 관련 둘, 그리고 아이들 대상의 장사 둘.


즉 「똥 퍼」와 「부전시장 공중변소 청소」가 한 묶음, 「숯 배달」과 「연탄장수」가 한 묶음, 그리고 「물방개 장수」와 「만화방 운영」이 한 묶음. 이렇게 셋으로 묶이지만 직업의 공통점도 보인다. 남들이 꺼려하는 일, 요즘으로 표현하면 3D 업종이라 할까. 나는 그 까닭을 안다. 특별한 기술도, 학식도, 밑천도, 도움 줄 친척도 없으니 뭘 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가장의 지게에 올려놓을 수 있는 건 극히 제한적인 일들뿐.


이번엔 아버지가 연탄 장수로 나선 일을 꺼내 본다. 이 직업은 비교적 기억에 남는다.


당시 월급쟁이들은 월급 받으면 광에 연탄부터 꽉 채웠다. 아시다시피 연탄은 건조돼야 불이 잘 붙고 가스도 적게 나오니까. 달마다 같은 날 목돈 들어오는 월급쟁이가 아닌 막일 하는 사람들은 저녁마다 19공탄 두 개를 오른손에, 왼손엔 고등어 한 손을 들고 산동네로 오른다.

우리 집은 당시 막내누나가 럭키회사 - 지금의 LG그룹 전신 - 다닌 덕에 길 아래 삼거리 전셋집으로 옮길 수 있었다. 연탄공장에서 럭키회사 간부사원 테니스장 - 지금의 연암박물관 -까진 트럭으로 실어다 줬으나 거기서부터 500m 넘는 우리 집까진 구르마('수레' 사투리)로 날라야 했다.


아버지가 구르마로 좁은 골목길을 혼자 통과하려면 힘들었기에 나도 도우려 나갔다. 아마 그랬으리라, 연탄장수 아버지를 기억함은. 그렇게 여러 차례 손수레 끌며 산동네 올라가는 길 입구 우리 집에 연탄을 갖다 놓으면 막일꾼들은 직접 들고 가고, 월급쟁이들은 아버지가 날라다 준다.

막일꾼들은 하루 번 돈으로 연탄 두 장과 쌀 한 봉지, 생선을 사서 산길을 오른다. 지금도 선하다. 한 손엔 연탄 밑바닥에 나뭇가지를 줄로 꿰어 들고, 다른 한 손엔 박씨점방에서 산 쌀 한 봉투를 산길 오르던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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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막일꾼들은 아버지에게 큰 도움이 못 된다. 조금이라도 비싸면 거리가 멀더라도 더 싼 연탄가게를 찾아가니까. 아버지의 진짜 돈줄은 바로 월급쟁이들이다. 이들은 한꺼번에 사다 재놓기도 하지만 가격에 그리 민감하지 않으니까.

아버지는 하루에도 수차례 연탄을 지게에 지고 산길 돌계단을 오른다. 지게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돈이 되고, 다리에 힘이 풀리면 풀릴수록 우리 집 형편이 나아지니 아버지의 어깨는 혹사를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와 동생 그리고 누님 셋은 허리가 조금 구부러진 신체상 공통점이 있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으나 아버지는 심하게 굽었다. 그래서 아내가 가끔 말한다, 아버지로부터 유전형질 이어받았다고. 아버지는 강골이었고 이도 일흔에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도 개상어를 씹을 만큼 이가 튼튼했다. 그리고 머리카락도 검은빛이 대부분이었고.

헌데 허리가 구부정했다. 앉아있으면 누구보다 건강해 보였으나 서면 오히려 나이보다 더 들어 보였다. 다 구부러진 허리 때문이다. 아마 아내가 아버지를 보았다면 (결혼 전에 돌아가심) 자기 짐작이 맞다고 쾌재를 불렀으리라. 아버지 허리와 내 허리와 누나들 허리가 다 구부러져 있으니.


아니다, 아내여! 부끄럽지만 아버지는 오랫동안 지게 져서 그렇고, 나도 어릴 때 지게 져서 그렇다. 아내여, 누님들도 마찬가지다.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날랐으니 젊을 땐 몰랐으나 나이 드니까 그게 드러난 거라고.

아무리 5, 60년 전 일이라지만 부산이란 대도시에 살면서 허리 구부러질 정도로 물건을 지거나 이고 다녔다면 누가 믿을까. 그러니 아내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으니 유전적이라 믿어 아들딸도 나중에 그런 체형이 될까 벌써부터 걱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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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동네 또래들은 나만 보면 놀리듯이 노래를 불렀다. 당시에 인기가요가 「빨간 마후라」 였다. 헌데 고추동무들은 그냥 부르지 않고 가사 바꾸기 하여 불렀다. 나 들어라고.


“빨간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마후라

빨간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 구름 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

아가씨야 내 마음 믿지 말아라 / 번개처럼 지나가는 사나이란다”


“검은마후라는 연탄집 사나이 / 연탄집 사나이는 검은마후라

검은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 바람 따라 날린다 연탄재 날린다

아가씨야 내 마음 믿지 말아라 / 번개처럼 타버리는 연탄이란다”


당시엔 그리도 듣기 싫었던 그 노래, 지금은 그렇게 불러줄 또래도 곁에 없다. 아니 누군가 불러주면 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을 텐데. 여러 번 나르기 싫어 한꺼번에 많이 실어 처음엔 움직이지 않던 손수레를 끌 때 안간힘 쓰던 아버지, 지게를 지고 산길 돌계단 하나하나 힘들게 밟으며 오르던 아버지,


내가 밥보다 석탄가루 더 먹었을 거라던 아버지,

코 풀 때마다 누런 코 대신 검댕이가 나오던 아버지,

언제나 연탄 묻어 양쪽 볼이 시커멓던 아버지,

오늘따라 그 아버지가 무척 그립다.


*. 글에 사용된 사진 두 장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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