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그리운 아버지(5)

제5화 : 아버지의 세 번째 직업 '숯 배달부'

* 아버지의 세 번째 직업 – 숯 배달부 *



어린 시절 마을 정경에 대한 추억을 그림으로 펼쳐놓을라치면 퍼뜩 떠오르는 정물화 중의 하나가 납새미(또는 ‘납세미’)가 철조망에 꼬치꼬치 걸려 있는 그림이다.

지금은 가자미란 표준어로 바뀌어 가자미회, 가자미튀김, 가자미찜, 가자미미역국, 또 북녘에 가면 가자미식해 등으로 이름을 날리면서 귀한 고기가 되었지만 그때 우리 마을에서는 납새미가 집과 집, 밭과 밭의 경계선인 철조망가시에 아가미를 뚫린 채 죽 늘어서 있었다.


그 시절 어떻게 그리도 많은 납새미가 잡혔는지 모른다. 다만 가장 흔했던 고기라는 사실만 떠오를 뿐. 얼마나 많았던지 ‘길 가는 똥개도 납새미는 물지 않는다.’는 말이 속담처럼 유행할 정도로 집집마다 걸려 있었다. 그 납새미를 지금처럼 다양한 요리로 해 먹는 대신 조림 아니면 구이뿐이었다.


아, 납새미 구이!

이 두 낱말을 떠올리는 그 순간 내 입가엔 침이 절로 스르르 괸다. 다른 집에선 주로 조림을 해 먹었으나 우리 집에선 늘 구이였다. 아무리 생선을 좋아하는 이도 찌개나 조림을 이틀 먹으면 싫증이 나지만 구이는 늘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납새미를 날마다 구워 먹을 수 있게 된 건 바로 우리 집에 끊임없이 숯이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날마다 어디선가 부스러기숯을 자전거에 가득 싣고 왔다.

이번에는 바로 그 숯 이야기를 하려 한다. 아버지가 숯장사를 하게 된 시기가 내가 몇 살 무렵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 기억은 퍼즐 맞추기처럼 조각 하나하나가 딱 들어맞을 때보다 한두 개씩 빠져있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요즘은 부산진구 초읍동 어린이대공원 근처의 아파트와 주택 가격이 근처 다른 지역보다 주변이 친환경적이라 하여 더 높게 거래되고 있는 걸로 안다.

하지만 나 어릴 때 거기 산다는 말은 가난하다는 말과 같았다. 해서 초등학교 다닐 때 그곳 아이들 대부분은 가난한 아이들에게나 급식으로 나눠주던 옥수수죽이나 옥수수빵을 타먹기 일쑤였다.


그때 그곳에는 적게나마 논밭이 있었고 산 쪽으로는 숯막도 있었다. 바로 아버지는 그곳 한 숯막에서 숯을 사 시장으로 팔러 다녔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부전시장은 물론 부산진시장까지 팔러 다녔다 한다.

이때부터 아버지로선 자전거를 이용한 본격적인 장사를 한 셈이다. 물론 이전에도 자전거를 이용했지만 그때는 출퇴근용이었다면 이번엔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이용한 일을 했다.

지금 그 노선을 아는 이라면 자전거로 거길 왔다 갔다 했다는 사실에 좀 의아해하리라. 자전거로 물건 싣고 다니기엔 너무 멀고 차량 통행량이 워낙 엄청나 위험하다고 여길 테니까.


솔직히 나는 아버지가 숯을 싣고 가는 광경을 본 적 없다. 그러나 큰 길가에 나가면 숯 팔러 다니는 이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어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짐칸에 앉은키보다 훨씬 높게 쌓인 숯을 실은 채 자전거를 요리조리 몰며 아슬아슬하게 사람과 차 사이를 빠져나가는 곡예에 가까운 그 묘기를 쉽게 볼 수 있었으니까.

초읍동에서 목적지인 부전시장이나 부산진시장까지는 거리가 꽤 되지만 몰기는 어렵지 않았으리라. 길이 제법 경사져 브레이크만 잘 조절하면 페달을 돌리지 않고도 수월케 내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올라오려면 힘들다. 하지만 그때는 빈 자전거일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테고.



다섯 자식의 아버지란 이름으로, 한 여자의 남편으로, 한 집안의 가장으로 살아가야만 했던 당신의 인생. 그때 자가용이기도 했던 아버지의 짐차자전거가 시장에서 돌아올 때면 1막은 끝난다. 아니 1막만 끝났을 뿐이다. 아직 다음 막이 남아 있다.

아버지는 다시 숯막으로 올라갔던 모양이다. 그런 뒤 집에 올 때면 언제나 팔 수 없는 부스러기숯을 가득 싣고 왔다. 분명 다 팔았으니 빈 자전거로 와야 했는데 언제나 짐칸은 돌가루(‘시멘트’의 경상도 사투리) 푸대(‘부대’의 경상도사투리)에 담긴 숯으로 가득했다.


그때마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따랐다.

“머할라꼬 또 갖고 오능교? 알아주는 사램 하나 없는데….”

그때는 어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집에는 숯이 필요했다. 석유풍로가 있긴 했지만 석유 구입에는 돈이 드는 대신 아버지가 갖고 온 숯은 그냥 갖고 오는 걸로 알고 있던 나로선 의아할 수밖에.


뒷날 들은 얘기로는 아버지는 시장에 가 직접 숯을 팔았던 게 아니라 거기 소매상에게 넘겨주었다 한다. 하루 두 번 숯을 넘겨주고 나면 집에 와도 되련만 일부러 다시 숯막으로 가 거기 일을 도와주고 부스러기숯을 가져왔다.

그 숯으로 우리 집에는 석유풍로 대신 화덕을 이용해 음식을 만들면 되기에 가져올 수 있다면 있는 대로 다 가져와야 했다. 그런데도 엄마가 싫어했음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가 갖고 온 부스러기숯은 우리 가족이 다 쓰기에는 너무 많았다. 거의 날마다 갖고 왔기에 만약 그대로 쌓아놓았으면 황령산(부산시 연제구, 부산진구, 남구, 수영구 등 네 구에 걸쳐 있는 산)만큼 높았을 거라고 엄마는 늘 과장하여 말했다. 그러니까 그 숯은 우리만 쓴 게 아니란 뜻이다.

아버지는 숯을 갖고 오면 도라무깡(‘드럼통’의 일본식 발음)에 갖다 붓는다. 그 도라무깡은 담 위에 걸쳐져 반은 집안으로 반은 길가로 나 있었다. 거기에 숯을 쌓아두면 문제가 없었으나 오래된 도라무깡은 구멍이 숭숭 뚫려 새는 곳이 많았다. 그런데 유독 담장 밖으로 난 쪽에 묘하게도 구멍이 집중돼 있었다.


도라무깡의 부스러기숯은 늘 빠져 길가로 흘렀다. 그러니 그곳은 늘 숯투성이, 검정투성이었다. 아마 지금 같으면 난리 났으리라. 길을 엉망진창 더럽혀 놓는 걸 누군들 입대지 않을까. 그러나 숯이 떨어져 길이 더럽다고 뭐라고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숯이 흘러 삐져나온 걸 볼 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 일러준다. “엄마, 숯 다 빠져나간다.”라고. 그러면 엄마의 대답은 “내사 모르겠다. 너거 아부지의 복장을. 이왕지사 남 좋은 일 할라꼬 했시면 마 기냥 갖다주면 될낀데 말라꼬 저래샀는지….”

아버지의 드럼통은 아마도 숯장사를 하는 동안 계속 그 자리에 놓여 있었지 싶다. 그리고 숯은 드럼통에서 계속 삐져나왔고. 나는 또 엄마에게 달려갔고. 대답은 한결같았고. 또 다음날도 숯은 쌓였다가 삐져나왔고.



나이 들면 다들 진중해지고, 욕심이 없어진다는데 나는 그 반대다. 나이 들수록 쓸데없는 말이 많아지고, 물욕과 명예욕은 끝 간 데를 모른다. 특히 내가 조금이라도 잘한 일 있으면 혹 남들이 모를까 하여 노심초사하다가 넌지시 드러내곤 한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게 아니라 오른손이 하지 않은 일조차 왼손이 알게끔 애쓴다.

도라무깡의 구멍을 이용해 슬그머니 부스러기숯을 삐져나가도록 만든 아버지를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몸으로는 이해 못 한다. 그래서 지금도 내 것만 찾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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