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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Dec 17. 2023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19)

제19편 : 고운기 시인의 '탈의나주'

@ 오늘은 고운기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탈의나주(脫衣裸走)
      - 삼국유사에서 3 -

  겨울철 어느 날 눈이 많이 왔다.
  황룡사 말단 스님 한 사람이 저물 무렵 삼랑사에서 돌아오다 천암사를 지나는데, 문밖에 웬 여자 거지가 아이를 낳고 언 채 누워서 거의 죽어 가는 것을 보았다.
  스님이 보고 불쌍히 여겨 끌어안고 오랫동안 있었더니 숨을 쉬었다.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벌거벗은 채 제 절로 달려갔다.

  기록에 나오는 우리나라 최초의 스트리퍼,
  탈의의 목적이 달랐을 뿐이다.

  여름철 어느 날 태풍주의보가 내렸다.
  국회 앞 경찰 한 사람이 ‘중증 장애인에게도 일반 국민이 누리는 기본권을 보장해 달라’는 피켓을 든, 휠체어 탄 장애인을 보았다.
  경찰은 ‘태풍 때문에 위험하니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장애인은 ‘담당하는 시간’이라며 거절했다.
  가만히 뒤에서 우산을 들고, 아무 말 없이 태풍 속에 서 있었다.

  하늘에서 왕사(王師)에 앉히라는 소리가 들렸다.
  트위터에 경찰청장 시키라는 댓글이 올라왔다.
   – [어쩌다 침착하게 예쁜 한국어](2017년)

  #. 고운기 시인(1961년생) : 전남 보성(벌교) 출신으로 1983년 한양대 재학 중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삼국유사에 관한 한 우리나라 최고 권위자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함께 나누기>

  시인은 [삼국유사] 연구 권위자인데, 고전을 연구하면서 그 속에 나오는 인물들을 글감으로 한 시를 몇 편 지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위 시입니다.
  제목 ‘탈의나주(脫衣裸走)’는 ‘옷을 발가벗은 채 (거리를) 달리다’는 뜻이므로 제목만 보면 웬 미친놈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구나 생각하며 읽었는데...

  단 ‘탈의나주(脫衣裸走)’는 삼국유사에는 바로 나오지 않습니다. 즉 시인이 만들어낸 한자성어라고 보면 됩니다.

  [삼국유사] 감통(感通)편에 보면 ‘정수사(正秀師) 구빙녀(救氷女)’ 설화가 나옵니다. 내용은 시 1연과 같습니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알거나 그 부분을 찾아 읽으면 책 속의 내용을 요약 압축시켰을 뿐이라 이 시를 아주 편하게 지었구나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아닙니다. ‘콜럼버스의 달걀 세우기’와 같습니다. 남이 한 걸 보면 쉬울지 몰라도 이 시인은 오직 삼국유사에만 매달렸기에 이런 시를 쓸 수 있었다고 봐야겠지요.

  “기록에 나오는 우리나라 최초의 스트리퍼, / 탈의의 목적이 달랐을 뿐이다.”

  스트리퍼가 무대에서 옷을 하나씩 던져버리며 춤을 추는 사람이라면, 이 시 앞부분에 나오는 스님 역시 스트리퍼입니다. 다만 춤을 추지 않았을 뿐. 그러나 그 목적은 완연히 다릅니다. 스님이 모진 된바람에도 옷을 벗은 까닭은 추위에 떨며 얼어가는 산모에게 덮어주려 했기 때문입니다.

  스트리퍼는 돈을 벌기 위해 옷을 벗어던진다면 스님의 ‘옷 벗음’은 생명 구함입니다.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보살행을 이룸이라 해야겠지요. 조금 더 달리 보면 스님이 옷을 벗음은 자기를 싸고 있는 형식, 겉치레, 번뇌를 벗어던짐과 같습니다. 어쩌면 해탈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준 지도...

  3연의 내용은 시인이 몇 년 전 어떤 이가 찍어 인터넷에 올린 사진 한 장을 보면서 글감을 잡았습니다. 이 부분 역시 연합뉴스에 뜬 내용을 참조하였기에 언뜻 보면 참 편하게 쓴 듯하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시인의 손을 거쳐 나오는 순간 창의적인 작품이 되었습니다.

  태풍주의보가 내린 날, 서울경찰청 소속 전승필 경위는 경비 근무를 나갔다가 30대 중반의 남성 중증 장애인이 비를 맞으며 1인 피켓 시위를 하고 있는 걸 봅니다. 전경위는 이 장애인에게 “오늘은 태풍 때문에 위험하니 일찍 귀가하거나 우산을 드는 게 어떻겠느냐?”라고 물었더니 장애인은 “몸이 불편해 우산을 들기 어렵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전경위는 한 점 망설임 없이 1시간 동안 장애인 옆에서 서서 우산을 씌워줬습니다. 그 행위를 칭찬하는 이들에게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경찰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저처럼 행동했을 것인데, 별것 아닌 일을 이렇게 좋게 봐주시니 오히려 당황스럽습니다."

  “하늘에서 왕사(王師)에 앉히라는 소리가 들렸다.”
  “트위터에 경찰청장 시키라는 댓글이 올라왔다.”

  앞 시구는 정수 스님에게 하늘에서 왕사에 앉히라는 계시가 내렸음을 말함이며, 뒤 시구는 SNS 댓글 가운데 한 사람이 전경위를 경찰청장 시키라는 글을 올렸다는 얘깁니다. 민심이 천심이라면 하늘도 움직이고 땅도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정수 스님은 왕사가 되었으나 전경위는 경찰청장이 되지 않았지만...

  #. 사진은 연합뉴스(2012. 9. 17)에서 퍼왔는데, 빗속에서 찍어선지 조금 흐릿합니다. 확대해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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