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모레노 빙하'를 찾아가는 날이다.
모레노라는 사람이 발견하여 이름 그대로 고유명사가 된 '모레노 빙하!'
남극 북극을 제외하고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빙하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거대한 '모레노 빙하!'
아파트 25층 높이(60m), 부산에서 울산까지(30km) 길이, 서울시 2/3 크기(400㎢)의 '모레노 빙하!'
모레노 빙하는 빛과 소리의 조화가 만들어 낸 걸작이다.
먼저 빛깔을 보자. 만년설이 만들어냈으니 당연히 '하양'을 주인공이라 여길진대 여기에 함정이 숨어 있다. 태양이 빙하를 비추면 아주 교묘하게 푸름으로 위장한다. 그 빛깔을 ‘푸르스름하다’ ‘푸르레하다’ ‘파스름하다’ '파리우리하다' 등 다 써 봐도 2% 부족.
영어인들 별 수 없다. cobalt blue, navy blue, sky blue, sea blue, royal blue 등 아는 대로 다 읊어 봐도 거기에 못 미친다.
다음으로 모레노의 소리를 들어보자. 빛깔에 감동해 하염없이 빙하를 바라보면 갑자기 정적을 깨뜨리는, 얼음덩이가 떨어져 나가며 만드는 굉음. 소리를 듣자마자 눈을 돌리지만 떨어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빙하 덩어리가 일으킨 거대한 물보라만 잠시 보일 뿐.
그 소리를 들으며 문득 그리스로마 신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물의 신 포세이돈과 그와 연인 관계에 있던 두 여신. 한 명은 추악한 몰골의 메두사와 다른 한 명은 지혜의 여신 아테나.
원래 메두사는 매우 아름다운 외모와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가졌는데, 그녀에게 반한 포세이돈이 처녀신 아테나의 신전에서 사랑을 나누다 들켜버렸다. 평소 포세이돈을 짝사랑하던 아테나는 자기 신전에서 보란 듯이 사랑을 나눔에 크게 모욕을 느껴 메두사에게 저주를 내린다.
이 저주로 메두사는 뱀으로 된 머리카락과 하체를 가진 흉측한 괴물이 되고 말았다 한다. 그뿐이랴, 그 뒤 메두사는 죽음을 당하고 그 사실을 안 포세이돈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세 신에 얽힌 이야기는 나중에 예술작품에 많이 응용됨)
포세이돈이 염증을 느껴 찾아간 그곳이 바로 여기 모레노 빙하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자기 무기인 삼지창으로 예뻤을 때의 메두사를 그리며 얼음조각하느라 빙하 덩이가 떨어져 나가 오늘도 그 굉음이 울리는 게 아닐까?
어떤 이는 빙하 조각이 아테나의 저주를 받아 흉측하게 변해버린 메두사를 연상케 한다고 하나, 포세이돈에게 메두사는 영원한 연인이었다. 햇빛이 모레노에 비치면 영롱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모레노 빙하를 보기 위해선 칼라파테로 와야 한다. 그 방법은 칼라파테 행 비행기를 타거나 우리처럼 바릴로체를 들러오거나 둘 중 하나. 칼라파테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거대한 '아르헨티노 호수'를 끼고 형성된 도시다. 호수 넓이가 여의도 80배에 이른다니 그 크기를 대충 짐작하시길...
우린 거기 가서 한 펜션에 짐을 풀었다. 입구에 자그마하지만 예쁘게 가꾼 꽃밭을 보는 순간 집주인이 적어도 한국 아니면 일본 여인임을 짐작케 했다. 전형적인 동아시아계 꽃밭이니까. 짐작이 맞아떨어져 알고 보니 한인 펜션이었다. 말 그대로 한국인이 운영하는 펜션이다.
여사장(그곳 이름이 'LINDA VISTA')의 이름을 딴 펜션을 운영하며 여행 대행업까지 해 칼라파테에선 아주 유명인사라 한다. 이 머나먼 이국에까지 와서 성공한 억척스런 여인을 보자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가 떠올랐다.
이 펜션에서 우리는 아주 특이한 체험을 했다. 우리가 먹을 만한 음식점이 없기에 슈퍼마켓에 가 재료를 사 와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 다행히 슈퍼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게 대부분 있었다. 쌀, 고춧가루, 감자, 고구마, 계란, 쇠고기, 송어, 상추, 마늘... (그러나 김치와 라면은 없다)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경쟁하듯이 음식을 만들어 내니 나온 결과물은 안 봐도 뻔한 일. 호텔에서나 음식점에서 먹다가 모처럼 먹는 집밥(?). 그래 여행은 이런 일도 있어야 또 다른 재미가 있지 않은가. '잘 먹는다'는 말보다, '맛나게 먹는 하루'가 되었다.
모레노 빙하, 포세이돈과 메두사, 그리고 모처럼 해먹은 집밥, 그래서 여행은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