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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Feb 02. 2024

목우씨의 긁적긁적(65)

제65화 : 아이들의 창의적 언어 세계

   * 아이들의 창의적 언어 세계 *



  퇴직하기 두어 해 전 카톡으로 학급 단톡방을 만들었더니 아이들이 신이 나 글과 시청각 자료를 올렸다. 그런데 녀석들은 담임이 국어교사인 걸 뻔히 알면서도 소위 인터넷 언어 -요즘엔 'SNS 언어' -를 마구 써댔다.
  평소에 그런 언어에 대해 거부감이 있던지라 아무래도 이렇게 놔둬선 안 되겠다고 생각하던 차, 마침 교과서에 인터넷 언어의 폐단을 지적하는 단원이 나오길래 ‘이때다!’ 싶어 일장 훈시를 했다.

  인터넷 언어는 맞춤법을 파괴하는 ‘아주 나쁜 행위’이니 절대로 하지 말라는 의도를 담았다. 아이들이 이내 수긍하는 눈치라 흡족하게 여기며 점점 더 열을 내, ‘언어는 말하는 이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따라서 잘못된 언어 사용은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게 되고 또…’ 하며 말을 이으려는데 한 애가,
  “선생님, 우리들이 인터넷에서 채팅할 때 쓰는 말을 실제 생활에는 쓰지 않아요. 거기서는 그렇게, 실생활에서는 이렇게 쓰는 걸요. 그리고 인터넷 언어는 우리가 즐기는 문화예요. 선생님 세대가 한자어를 즐겨 썼듯이 말입니다.”


([한국일보] 2014년 9월 18일)



  그러자 아이들은 너나없이 ‘맞아요!’ '맞아요!' 하는 소리를 연발했다. 그때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걔들은 그 언어를 자신들의 문화라 인식하고 있는데, 나는 정해진 법규를 깨뜨리는 ‘몹쓸 짓’으로 여겼지 않은가.
  그날 아이들에게 판정패한 이상, 이왕지사 확 열어놓아 보자는 생각에 자신의 창의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인터넷 언어로 적어보라고 했다. 아이들은 환호하며 막 야단이었다. 그리고 정말 신이 나서 만들어 냈다. 쓴 이의 해석 없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작품(?)들을 보면서 선언했다, 단톡방에 올리는 글에 대해 규제를 하지 않겠다고. 그 뒤로 단톡방은 더욱 활발해졌다. 고기를 먹어본 사람이 잘 먹듯이 맞춤법에 익숙한 아이들일수록 더욱 새로운 말들을 만들어 내면서 글방은 이전보다 훨씬 생동감 있게 살아났다.


(인터넷 언어는 띄어쓰기를 무시하다 보니 우스개가 되기도 함 - 구글 이미지에서)



  그런 며칠 뒤 백일장 시간이었는데, 그날 나온 우리 반 아이의 작품 몇이 충격을 줬다. 시로 제출된 글에,

  ‘꽃니플
      나풀나풀 날리며
          멀어져 가는 바람...’

  이라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처음엔 ‘꽃니플’이 ‘꽃잎을’을 잘못 적은, 즉 맞춤법을 몰라 실수한 거라 여겼다. 그런데 이름을 보니 그 애는 성적이 아주 우수한, 적어도 그 정도의 맞춤법에 실수할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글을 살펴보았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꽃니플’의 ‘니플’과 ‘나풀나풀’의 연계성이었다. 그 애는 소리 나는 대로 적는 인터넷 언어의 원리를 살려 시구를 만들었던 것이다. ‘시적 허용’이니 하는 용어를 굳이 쓰지 않더라도 ‘꽃잎을 나풀나풀~’과 ‘꽃니플 나풀나풀’ 이 둘을 비교하면 뒤엣것이 훨씬 도드라지지 않은가.

  그리고 다른 한 아이는 ‘우리 가족’을 글감으로 시(?)를 만들었다.

(스캔해 놓은 작품을 잃어버려 글쓴이가 재구성함)



  알 듯 말 듯 한 표현이라 글 쓴 애를 불러 물어보기 전에 교무실에 온 다른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별 망설임 없이 가족구성원과 나의 관계가 줄줄이 엮여 나왔다. '그림말' - 이모티콘 - 을 알면 아무것도 아니란 설명을 덧붙이면서.
  즉, 저들은 메일 보낼 때나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 보낼 때 늘 사용하는 언어라 전혀 낯선 게 아니라고 했다. 나와 가장 친한 이는 할머니인데 싱글벙글 웃는 표지로, 아버지와는 행복한 표지로, 어머니와는 우울한 표지로, 동생과는 눈물 흘리는 표지로 서로의 관계를 알 수 있다는 설명.

  그러나 이 아이도 중간중간에 쓴 원, 오각형, 사각형, 삼각형의 의미는 몰라 글 쓴 애를 불러 확인해 보았다. 그 애는 언젠가 ‘교우 관계도’를 사회 선생님께 배우면서 원만한 관계는 '원'으로, 그렇지 않으면 '세모'로 표시하라고 한 말이 생각나 그것을 활용해 보았다나. 도형에서 오각형은 원보다 못하지만 사각형보단 낫고, 사각형 모양은 삼각형보다 낫다는 식의 해석.
  나는 솔직히 이게 시가 되는지, 또 시가 된다면 뛰어난 작품인지 아닌지 판별할 능력이 없다. 허나 분명한 건 언어가 지닌 표현 한계를 극복하려 한 점에서는 높이 사야 한다고 본다. 더불어 이처럼 사고의 문을 조금만 열어줘도 아이들 사고 영역은 끝없이 확장됨도 알 수 있으리라.


(사각형 하나로 시상을 엮어 훌륭한 동시가 됨 - 동시인 문현식 선생님 작품을 어린이가 필사함)

 


  김수영 님의 「폭포」란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이하 생략)”

  폭포 물줄기는 어디든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흘러내린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자유로운 존재인 언어를 규정해야 할 필요가 가끔은 있으리라. 그러나 규정이 규정으로 끝나지 않고 강제로 엄격히 통제하려 든다면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사고의 폐쇄로 연결돼 창의성을 막을 게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젠 인터넷 언어를 정규방송에도 사용함)



   자식 자랑 하면 팔불출이라 하는데 딸아이가 초등학교 때 쓴 동시의 예를 들어본다. 글의 취지에 맞을 것 같으므로. 딸이 3학년 때 동원(주)에서 주관한 ‘바다 사랑 글짓기 대회’에 동시를 제출하였다. 다 기억나지 않으나 아래 두 시행은 생각난다.

  “파도는 ㅅ ㅅ ㅅ ㅅ 어깨동무 하고
  갈매기는 ㄹ ㄹ ㄹ ㄹ 띄엄띄엄 날고 있다”

  그때 내가 도움 준 말은 다음말이다.
  '바다에 가면 파도가 밀려오고 갈매기가 난다는 표현 말고, 네 눈에 들어온 느낌을 떠올려라'라고. 딸은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 나가는 모습을 ‘ㅅ’이 어깨동무 한 모습으로 보았고, 갈매기가 나는 모습을 ‘ㄹ’이 옆으로 누운 모습에서 찾았다.
  만약에 내가 이래라저래라 하고 계속 훈수 두었으면 아마 저런 표현을 뽑아내지 못했으리라. (결과는 '금상'으로 다른 상품은 기억 안 나나 그해 동원참치는 이웃에 나눠주고도 실컷 먹었다. 딸은 나의 기대완 달리 미대로 갔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창의성이 뛰어나다. 겁 없이 마구 쓰니까. 허나 통제하려 들면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왜냐면 아이들은 폭포 물줄기처럼 자유롭게 튀어나가는 존재인데, 한 방향으로만 가게 만들면 창의는 없어지고 '천편일률'만 남는다.

  *. 이 글은 10년 전에 썼는데 조금 다듬어 배달합니다.

  요즘 청소년들이 욕(비속어 포함)을 많이 하고 한글 언어판을 파괴한다는 주장도 나오는데, 그 문제에 대해선 다음에 다룰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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