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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Feb 03.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58)

제58편 : 박영근 시인의 '서시'

@. 오늘은 박영근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서시
                    박영근

  가다가 가다가
  울다가 일어서다가
  만나는 작은 빛들을
  시라고 부르고 싶다.

  두려워 떨며 웅크리다
  아주 어두운 곳으로 떨어져서
  피를 흘리다 절망하는 모습과
  불쌍하도록 두려워 떠는 모습과
  외로워서 목이 메이도록
  그리운 사람을 부르며
  울먹이는 모습을,
  밤마다 식은땀을 흘리며
  지나간 시절이 원죄처럼 목을 짓누르는
  긴 악몽에 시달리는 모습을
  맺히도록 분명하게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고 부딪치고
  부딪쳐서 굳어진 것들을 흔들고
  흔들어 마침내
  다른 모든 생명들과 함께
  흐르는 힘을
  시라고 부르고 싶다.

  일하고 먹고 살아가는 시간들 속에서
  일하고 먹고 살아가는 일을
  뉘우치는 시간들 속에서
  때때로 스스로의 맨살을 물어뜯는
  외로움 속에서 그러나
  아주 겸손하게 작은 목소리로
  부끄럽게 부르는 이름을
  시라고 쓰고 싶다.
  - [취업공고판](1984년)

  #. 박영근 시인(1958년~2006년) : 전북 부안 출신으로 1981년 [반시(反詩)] 6집을 통해 등단. 민중가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작사가며, '최초의 노동자 시인'이란 접두어가 붙음



  <함께 나누기>


  한때 시론을 물고 늘어질 정도로 읽은 저도 시에 대한 정의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작품을 본 적 없습니다. (있다면 그저 제 지식의 부족으로 여겨주시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시들 가운데는 밝음과 사랑과 행복과 평화를 노래하는 시가 참 많습니다. 그걸 노래함도 좋은 시가 되겠지요. 헌데 시인이 생각하는 시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에서 좀 벗어납니다. 아니 매우 벗어납니다.


  '작은 빛들', '절망하는 모습', '두려워 떠는 모습', '울먹이는 모습', '악몽에 시달리는 모습'들을 애절하게 찾습니다. 허나 이렇게만 끝난다면 허무와 어둠만이 존재하겠지요.

  “맺히도록 분명하게 받아들이고 / 받아들이고 부딪치고 / 부딪쳐서 굳어진 것들을 흔들고 / 흔들어 마침내 / 다른 모든 생명들과 함께 / 흐르는 힘”

  바로 여기에 이 시의 건강함이 드러납니다. 모든 상처받은 존재들을 치유하는 힘이 엿보이지 않습니까. 조약돌은 작고 둥급니다. 허나 그리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부딪힘과 깨어짐을 통해 스스로를 단련시켜 왔을까요?


  제가 이 시에서 특히 좋아하는 연은 3 연입니다.


  “아주 겸손하게 작은 목소리로 / 부끄럽게 부르는 이름을 / 시라고 쓰고 싶다.”


  억눌린 시대를 살면서 어느 누구보다 많이 울고 많이 아파온 시인의 소리 낮춤은 더욱 이 시의 품격의 도드라짐을 느낍니다. 읽으면서 부들부들 떨림을 주는 시를 자주 보지 못하는 시대에 살며, 시구 하나하나가 울리는 진동이 주변에 조용히 퍼져나기를 잠시 빌어봅니다.


  *. 박영근 시인이 살았던 인천 부평4동에 시인을 기리는 시비를 2012년에 세웠습니다. 또 그의 이름을 딴 박영근문학상을 제정해 오늘날 많은 작가들이 그의 시 정신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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